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5.22 10:30
조선의 국가 상징 중 하나였던 사직단의 모습. 1910년대에 일본이 촬영한 사진이다.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전철 역명 직산(稷山)의 맥락도 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에 이르러 현재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선에 들어서는 직산현(稷山縣)의 행정을 아우르는 읍치(邑治)가 있다가, 정식으로 지금의 지명으로 자리 잡은 때는 1916년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그 전의 고구려 때에는 사산(蛇山), 신라 때에는 백성(白城) 등의 지명도 얻었다는 설명이다.

이 이름의 유래 또한 명확하지 않다. 백제 때 이곳 인근에 있던 위례성(慰禮城)의 사직(社稷) 터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추정도 있고, 이곳 일대에 곡물의 일종인 피가 잘 자라 그를 가리키는 한자 직(稷)이라는 이름이 붙었을지 모른다는 설도 있다.

한자의 자취를 좇는 우리의 관심은 우선 稷(직)이다. 이 글자는 우선 앞에서 이야기한 ‘피’를 가리킨다. 볏과의 한해살이 풀이다. 곡식으로도 쓰고, 가축의 사료로도 쓴다. 아울러 기장이라는 식물도 가리킨다. 피와 기장의 차이가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기장은 우리가 오곡(五穀)이라 부르는 볏과 식물이다. 수수와 팥, 쌀과 조를 기장과 함께 넣고 만드는 밥이 오곡밥이다. 지금 우리의 주식 리스트에 넣을 수는 없지만, 동양의 북부지역 사람들이 한때 즐겨 먹었던 식물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가 그런데, 남부 지역의 중국은 전통적인 ‘중원(中原)’으로 볼 수 없었다. 지금의 장강(長江) 이남의 광활한 지역이 모두 그랬다. 이곳의 주식은 고래로부터 쌀인 미곡(米穀)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 3000년 전에는 그랬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두고 볼 때, 황하(黃河)가 중심을 이루는 중원 지역 일대 사람들의 주식은 기장과 수수 등이었다.

따라서 이 점을 두고 볼 때는 지역적으로 주식을 달리 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중국 남부와 북부에 따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중국은 그 이후에 황하 문명이 주류를 이뤄 중국 전역을 정치적 공동체로 통일하는 작업에 나선다. 그들은 기장과 수수를 주식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기장과 수수를 먹던 사람들이 남부의 쌀을 먹고 살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런 북부 중국의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이 稷(직)이라는 식물, 또는 그로써 상징하는 농작물들이 생명의 근간을 이뤘다. 고대 중국에서 이 글자가 차지하는 위상(位相)이 매우 높았던 이유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후직(后稷)이라는 인물, 또는 관직(官職) 이름이다.

后稷(후직)이라는 인물은 현재 중국 문명의 토대를 이룬 주(周, BC 1046~BC 256년)의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가 펼쳐지기 전의 전설 시대에 해당하는 요(堯)와 순(舜) 임금 때의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농사를 주관했고, 실제 그런 공덕 때문에 농사의 신(神)으로 떠받들어지며, 나중에는 周(주)나라 왕실에서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의 이름으로도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사직(社稷)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고대국가 체제의 틀을 일컫는 단어다. 여기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농업의 신을 각각 일컫는다. 국토와 농업, 즉 국가나 왕조를 구성하는 근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왕궁의 옆에 모셔두고 성대한 제례(祭禮)를 올렸다고 한다.

서울을 예로 들어보면, 경복궁 서편에 이 社稷(사직)이 있다. 이제는 그를 공원으로 호칭하지만, 예전에는 단(壇)으로도 불렀다. 조선이 동양의 고대 예제에 충실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곳에서는 연례행사로 성대한 왕조의 제례가 올려졌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일 게 있다. 직하(稷下)라는 이름이다. 이는 전국시대(BC 443~BC 221년) 제(齊)나라의 도성에 있던 문(門)의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선 최고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직하학궁(稷下學宮)이다. 이로부터 배출된 수많은 학자가 다 이름이 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던 순자(荀子)가 유명하다.

그로부터 길러진 사상가들이 중국 전통사상인 법가(法家)의 학맥(學脈)을 이룬다. 한비자(韓非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 전역을 통일한 이사(李斯)가 대표적인 제자다. 중국 북부 지역 사람들의 주식이었던 기장, 그 한자인 稷(직)의 쓰임새가 이렇게 이어진다. 그들은 결국 중국 전역을 통일의 판도에 앉히는 사업에 성공했다.

우리의 稷山(직산)이 꼭 중국의 그런 경우와 같지는 않을 테다. 그러나 한국의 稷山(직산)도 농업이 꽤 발달했던 곳으로 나온다. 그런 농업의 풍성함이 중국의 예를 참고로 삼아 한국의 한 지명으로 자리를 잡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도 지금 그 稷山(직산)의 지명이 남아 있으니, 바로 앞에서 소개한 后稷의 고향이라고 한다.

한자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이렇게 중국의 경우와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생긴 그 한자의 유래와 역사를 거울로 삼아 우리의 속내를 키울 뿐, 그와 같아질 수는 없는 일이다. 社稷(사직)은 옛 국가의 근간이다. 그를 설정함으로써 통일적인 지향을 갖췄고, 그로써 사람들을 설득해 통치의 토대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근간은 다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의 근간을 제대로 설정해 그를 잘 발양(發揚)하고 있는 것일까. 피와 기장, 나아가 농업이 발달했던 稷山(직산)이 슬쩍 던지는 화두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도서출판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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