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5.25 15:55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2009년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포스터. 원작은 보편적인 주제 설정과 번역의 힘이 고루 작용해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영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소설가 한강씨가 만부커 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쾌거이며 낭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씨의 역할이 더 컸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 문학이나 예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평과 비판이 항상 따라 다닌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후보인 무라카미 하루키씨도 정작 일본 국내에서는 비판과 냉소를 달고 다니는 작가다.

그래서 한류가 태어났다. 한류는 우리나라 안에서는 좋은 평가나 대우를 못 받는 문화 창작자들이 해외로 나가서 외국인들에게 평가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운명적으로 해외의 소비자들에게 작품을 팔아 생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조그마한 국내시장에 갇혀 있다.

한국이 현대화하고 경제성장을 거두면서 내수시장이 나름대로 커졌지만, 동시에 경쟁 또한 더 심해지고 말았다. 특히 홀대받는 문화장르의 창작자들은 더욱 더 생존하기 힘든 현실에 놓여있다. 대표적으로 시와 소설이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더 많이 해외로 나가 제2의 무라카미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태껏 우리는 한국의 소설이나 시가 제대로 해외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눈여겨보지 않았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금메달을 휩쓸 때까지, 아무도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 같다.

 

한국소설이 왜 안 팔릴까?

1960~70년대 백낙청 교수는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민족문학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거리를 두게 될 때 그 질이 더 떨어진다고 했다. 즉, 백 교수의 한국민족문학론은 역사적 주체를 자처하는 소수민족의 능동적이며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존 리 교수는 재일동포들의 문학이 스스로의 민족성을 자각해 적극적으로 한국인 혹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아의식을 문학작품에 녹아내리게 함으로써 역사 주체로서의 재일한국인(혹은 자이니치)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늘 주장했다. 백낙청 교수도 같은 맥락으로 우리의 민족문학은 전 세계에서 소수민족의 문학일지라도, 새로운 역사적 주체 의식을 깨우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백 교수가 자랑할 만한 민족문학이라고 내세운 박경리의 <토지>, 김지하의 <오적>, 고은의 <만인보>,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등은 우선 그 내용이 너무나 한국적이라는 점이다. 또 특이한 한국만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며, 무엇보다도 그 페이지수가 너무 길다는 점도 문제였다.

바꿔 말하자면, 외국의 번역가가 아무리 이들 작품에 매력을 느꼈다고 해도 번역 작업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장편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그 명성이 알려지도록 공헌한 영국의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Constance Garnett)과 같은 열정적인 영어권의 인물들이 과연 한국문학계에는 몇이나 될까?

톨스토이의 장편 <전쟁과 평화>가 고작 4권으로 끝난 것에 반해 <토지>는 16권, <태백산맥>은 10권, 그리고 <장길산> 또한 10권이다. 너무나 한국적인 내용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토속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10여권의 소설을 어느 영국, 미국의 번역가가 감히 번역을 하려고 할까하는 말이다.

 

보편적 주제의 결핍

작품의 길이를 줄인다 해도 백낙청 교수의 주장대로 민족문학의 역사 주체적 실천과 행동의 주제로만 전 세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일은 가능할까? 한류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것은 누누이 설명하였지만, 우리 한류의 드라마나 케이 팝의 보편적인 주제 때문이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민족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지구촌 전체가 즐길 수 있는 객관적인 주제가 절실해진다는 뜻이다.

이번 만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아주 보편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이 번 강남역에서 발생한 불특정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에서 보듯이, 여성은 여러 종류의 폭력에 시달린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며 경찰관들이 잣대를 여성의 허벅지에 들이 대기도 했고, 젊은 버스 여차장들이 동전을 횡령한다고 하여 옷을 벗기고 손으로 몸수색을 하기도 하였다. 1966년 10월 26일자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 회사에 10명이 넘는 감찰반이 있고 다음은 40명 내외의 암행반, 노파차림에서 대학생차림까지 한 이들은 차장에겐 가장 무서운 존재. 감찰반과 암행반의 보고를 토대로 여감독이 「센타」(몸수색)를 하게 된다. 하루 세 번 정도. 지난 25일 신흥교통 소속 여차장들이 파업한 것도 지나친 몸수색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21일 권희진(18·서울영20101급행「버스」차장)양이 몸수색을 당하고 매까지 맞은 끝에 한강에 투신자살한 것도 몸수색이 얼마나 비겁한가를 보여준 증거. 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채식주의자>는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역작이다. 육식이라는 인간의 행위와 동물을 도살하는 행위 등에 대해 동물처럼 폭력적 희생을 당하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한국 문학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주체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런 주제는 남성 작가들이 주도하는 민족문학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며, 채식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개념을 한국적 상황에서 묘사하면서도, 세계화 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한류 현상인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문학의 영역 작업

한류 드라마가 전 세계를 강타할 수 있었던 것은 풀뿌리 번역가들이 유튜브나 기타 스트리밍 서비스에 번역된 자막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원작이 아무리 훌륭해도 번역작업을 경시하는 사회의 문학작품은 국내 시장에서만 경쟁할 수밖에 없다. 문학번역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없는 한국에서, 과연 얼마나 번역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책의 번역을 학자의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선진 외국의 학문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국내 학자들이 영어나 주요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선진국의 연구 동향을 알 수 없고, 그저 귀동냥과 발에 의지해야 하는 연구 풍토에서 노벨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채식주의자>가 이룬 쾌거를 이어가기 위해서 한국 문학의 번역 작업은 풀뿌리 운동으로 번져야 한다. 아울러 이를 권장하는 인터넷이나 웹 토대의 번역문학 사이트들이 아주 많이 생겨나야 하며, 학계와 정부는 관심에 이어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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