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5.25 16:16
전라북도 남원에 있던 옛 조선의 객관(客館) 용성관(龍城館)의 모습이다. 1910년대 초반 일제가 촬영한 사진이다. 이같이 멋진 건축물과 정반대의 집이나 방이 누실(陋室)이다.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안사(安史)의 난’이라는 내전이 벌어져 국가의 기운이 급격히 기울어 수많은 백성들이 참담한 상처를 입었다. 안으로는 성정이 음험한 환관들에 의해 졸렬한 정치가 펼쳐지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약해진 중앙 왕실의 허점을 파고드는 호족 세력의 발호가 그치질 않았다.

당 왕실이 최고조의 국력을 발하던 성당(盛唐) 때를 보낸 뒤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시기의 모습이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니 천재 소리를 들었을 법한 유우석(劉禹錫)은 이 때 정쟁에 휘말린다.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당시의 정치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그는 좌천당한다. 권세를 독차지했던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그들에게 밀려나 지금의 중국 동남부 안후이(安徽)성 조그만 현의 ‘통판(通判)’이란 자리를 받는다. 이 벼슬은 남송(南宋)에 가서야 나름대로 지방관을 규찰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직위지만 당나라 시절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지방의 한직이었다.

중앙 왕실에서 권력 다툼에 밀렸다 싶은 그를 환대해주는 지방관은 없었다. 그의 상사는 골탕까지 먹이려 든다. 통판이란 벼슬에게 내주는 세 칸짜리 관사(官舍)를 두고서다. 지방관은 갖은 구실을 대서 그의 거처를 두 번 더 옮기도록 한다. 옮기면 옮길수록 그의 관사는 좁아지고 형편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받은 거처는 침대 하나에 책상과 의자 한 벌인 작은 방.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들여놓을 하찮은 거처였다.

그의 유명한 문장 ‘누실명(陋室銘)’은 여기서 나온다. 글 제목은 ‘누추한 거처에서의 새김’이라는 뜻이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좋은 산일 터,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리라. 이 집이 누추하더라도 내가 닦은 덕으로 그윽할지니(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보기에도 한심했을 거처, 즉 '누실'에서 내보이는 유우석의 기개가 가상하다. 자신이 놓인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자신감은 스스로의 덕에서 비롯하는 것일 게다. 그 덕이란 반드시 도덕적인 기준을 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우석 본인의 속을 가득 채우는 실력과 사람 됨됨이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속 누실은 한 개쯤은 있을 수 있다. 그게 학벌이든 신체적인 결함이든 남에게 자랑스레 밝히지 못할 곡절 하나씩은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누실의 반대어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리라. 그러나 보기에 호화로운 집에 몸을 들이더라도 됨됨이와 교양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다면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요즘 명문대를 졸업한 뒤 판사와 검사로서 요직에 올랐던 이들이 변호사로서 참 그릇된 행위를 하며 돈을 벌어들이다가 사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일을 자주 본다.

겉멋을 위한 수식, 제 욕심만 채우려고 금전을 향해 허망할 정도로 달려가는 이 사회 엘리트들의 수준을 알려주는 현상이다. 모두 사람 됨됨이, 차분한 교양과 높은 지성(知性)을 상실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누실 공포증’이랄까. 아무튼 우리사회는 잔잔한 물, 담연(淡然)함의 정신적 경계를 잃은 지 제법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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