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6.02 09:23
연애결혼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변화가 연애를 통한 결혼보다는 상품, 즉 성(性)만 탐닉하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연애결혼-. 듣기만 해도 달콤한 말이다. 그러나 이젠 아쉽게도 작별을 고할 때다. 연애가 없어지니 연애결혼도 자동적으로 소멸할 위기다. 600만년 진화의 역사에 남녀가 있고 매력이 엄연한데, 연애결혼은 없어진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고 반문하겠지만 슬프게도 사실이다.

중앙일보는 한국 젊은 여성의 약 61%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조사를 발표했다. 자녀 문제에 이르면 비율은 더 커진다. 이유는 돈이다. “자본주의 교리가 돈”이라 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상품을 만들고 벌어 쓸 소비자도 한 축인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을 부수고 있는 셈이다.

연애결혼이 대세라서 “중매결혼은 정략결혼”이라며 경멸의 대상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결혼을 정당화해주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가 먹혔다. 하지만 뒤돌아보라. 연애결혼, 사랑의 서약은 얼마나 된 것일까? 가까이는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도 중매결혼이었다. 아니, 5000년 역사가 온통 중매결혼이다. 100년도 안 된 연애결혼이 5000년 전통에 침을 뱉는 격이다.

얘기는 이렇다. 연애결혼이란 자본주의, 도시화와 함께 생겨났다. 전통사회에서는 가문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기에 혼인은 가문의 일이었다. 사랑이 생기면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가문이 정한 정혼자와 정 붙이고 살아야 했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며 얘기는 달라졌다.

커져가는 도시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젊은 남성 노동자가 필요했다. 이를 뒷받침할 여성 노동자가 가세한다. 도시는 젊은 남녀로 가득 찬 것이다. 남녀가 모이면 연애는 필수고 동거는 선택이다. 고향에 두고 온 꽃분이는 멀리 있고, 눈 맞은 영순이는 가깝다.

가문을 떠나 혈혈단신 도시로 떠난 삼돌이와 고무공장에서 단봇짐을 싸서 상경한 순애가 만나 연애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가족을 이루며 다시 도시를 채웠다. 그렇다. 사랑과 결혼은 자본주의의 핵심교리인 상품 생산 노동자이자 소비자 공장이다. 자본주의 도시가 사랑, 연애결혼과 핵가족을 만들고 다시 자본주의를 지탱한 것이다.

자본 이전에 연애가 있었음을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춘향이를 들어 항변할 수 있다. 그런데 걔들 결혼은 했나? 소설이나 판소리 모두 연애만 있고 결혼은 없었음을 증언한다. 한 커플은 연애하다 정사(情死)하고 한 커플은 영웅놀이에 심취했다.

11~12세기 기사(騎士)문학 대부분은 기사와 지체 높은 귀부인의 불장난이고 부르주와 문학은 유부녀 불륜 로맨스다. 그리스도교 성서도 마찬가지다. 구약에서는 신이 사랑의 중심이고, 신약에서도 애인이 아닌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라 한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한 다음에 사랑하라는 얘기다.

남녀가 있으니 사랑도 있다. 자본주의 사랑의 형식은 연애결혼이다. 그런데 연애는 부담스럽다 한다. 서로 간보며 썸만 탄다. 그러다 보니 온갖 사랑 행위는 다 하면서도 고백은 없기에 연애가 아니란다. 결혼은 더 부담스럽다. 자녀는 생각하기도 힘들다. 사랑은 흔하지만 연애는 희귀하고 결혼은 실종이다.

사랑과 자유연애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가족 사랑의 소중함을 지켜준 자본주의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제 자본주의의 변화로 연애결혼은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 즉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노동자와 소비자 생산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자본주의 교리인 연애결혼이라는 형식이 변하니 내용 역시 바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전통사회의 사랑 없는 결혼이 공허했다면 자본주의의 결혼 없는 사랑은 맹목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맹목적인 성의 세상으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성의 형식은 사라지고 상품만 남는 것이다. 혹 한마음의 노래대로 “긴 세월 지나가도 사랑을 친구라 하네” 가 미래의 사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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