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6.08 10:52
바람을 알리는 풍향계다. 이런 바람으로 문화의 수준을 나타내는 낱말들이 많이 발달했다. 한국의 문화 풍향계는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북송의 걸출한 문인 소식(蘇軾 소동파)은 중국의 수많은 역대 문인 중에서도 달관(達觀)의 경계를 잘 드러낸 사람으로 꼽힌다. 세상만사의 슬픔과 기쁨, 눈물과 웃음 등의 좁은 테두리를 지나 좀 더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린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가 어느 날 달빛 아래서 술을 마신다. 그리고 묻는다.

“달님은 그 자리에 얼마나 계셨소? 술잔을 들고 묻습니다. 하늘 위 궁궐, 그곳에서의 오늘 이 저녁은 어느 무렵입니까?…” 그의 유명한 사작(詞作) 첫머리다. 위의 두 물음 중에 뒷부분에 괜히 눈길이 간다. 원문은 “不知天上宮闕, 今夕是何年”이다. 패러디 하고 싶은 대목이다. “내가 오늘 사는 이 땅은 도대체 어느 시절입니까”라며 말이다.

문득 문화(文化)라는 단어가 떠올라 글을 적는다. ‘글월’을 뜻하는 文(문)에 ‘변하다’는 새김의 化(화)가 만난 조합이다. 라틴어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의 번역어다. 원래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자로 문화(文化)라고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동양에서 文(문)은 글월 정도의 뜻만은 아니다. 역시 사람의 손길이 덧붙여져 다듬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로써 이뤄진 상태, 또는 변화의 정도를 가리키는 글자가 化(화)다. 따라서 文化라고 하면 사람이 만들어낸 문물이나 제도 등에 의해 다듬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옛 중국이 지닌 자존감은 매우 높다. 높아서 어느 경우에는 교만함을 풍기기도 한다. 그런 중국이 제가 지닌 문화적인 역량을 과시하면서 자신보다 뒤떨어진 곳을 부를 때 화외(化外)라는 말을 쓰곤 했다. 문화적 세례를 거치지 못한 곳이라는 뜻의 지칭이다.

풍속(風俗)이라는 말도 그에 견줄 수 있다. 바람은 널리 미친다. 바람처럼 그렇게 널리 닿는 어느 땅, 어느 사람들의 습속을 이를 때 風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풍기(風氣), 풍조(風潮), 풍습(風習) 등이 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낱말이다.

풍화(風化)라는 단어도 있다. 자연과학 용어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교육 등 인위적인 요소를 거쳐 변화하는 정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화(文化)와 같은 맥락의 단어로 받아들여도 좋다. 보다 직접적으로 대상을 가르쳐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말은 교화(敎化)다.

서울 구의 전철역의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숨진 19세 비정규직 청년의 이야기와 함께 한국의 남녘 어느 섬에서 벌어진 사건이 화제다. 외딴섬에 홀로 부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선생을 세 명의 남성이 성폭행한 사건이다. 그 중에는 제 아이의 교육을 여선생에게 맡긴 학부모도 들어 있다고 한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납득키 어렵다.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적기에는 짐승의 이름이 가엽다. 그보다 더 추악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의 행위를 실제 목격한 느낌이다. 극도로 피폐해진 이런 인성(人性)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한 것일까.

야비(野鄙)의 극단, 추잡(醜雜)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한국의 교육과 소양의 세례, 문화의 정도가 어느새 이 정도까지 추락했는지 탄식이 배어난다. 바람 불어 먼지 가득한 풍진(風塵)의 대한민국, 그 오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의 어디쯤일까. 벌써 ‘막장’으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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