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6.08 11:06
봄에 활짝 핀 남산의 꽃이다. 꽃은 예로부터 芳(방)이라는 글자와 함께했다. 1호선 배방역은 그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호서(湖西) 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역이다. 기차역으로 만들어진 이래 줄곧 간이역(簡易驛)으로 한적한 기운을 뽐냈다가 전철 1호선과 다시 이어지면서 이제는 어엿한 역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행정적인 변천사는 대개 이렇다. 원래는 온양군에 속해 있었다. 동상(東上)면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인근 배방산(排芳山)의 이름을 따서 배방면으로 자리 잡은 뒤 아산군에 들었다.

해발 361m의 배방산은 일설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때 지략으로 뛰어났던 성배(成排)와 성방(成芳) 남매의 이름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옛 지도와 기록에는 이 산의 한자 이름이 같은 발음이되 글자를 달리 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 고증이 더 필요한 편이다. 어쨌거나 이 산에는 둘레 1500m에 달하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고려 초에 왕건이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는 추정이 있다.

우선 한자 排芳(배방)을 들여다보자. 앞의 排(배)는 우선 ‘밀어내다’ ‘밀치다’의 새김이다. 배타(排他)는 남(他)을 밀어내는 행위다. 비슷한 단어가 배척(排斥)이다. 밀어내면서 타격까지 가한다면 배격(排擊)이다. 남을 밀어내 물리치는 일이다. 물리쳐 없애는 일이 배제(排除),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 배출(排出) 또는 배설(排泄)이다. 오줌을 내보내는 일은 배뇨(排尿)다.

배수량(排水量)도 눈여겨볼 단어다. 사전적으로는 ‘물을 밀어내는 양’인데, 선박의 크기를 가늠하는 단위다. 물건을 실었을 때 그 배가 물을 밀어내는 양이라는 뜻이다. 배수관(排水管)은 물을 내보내는 파이프다. 가스나 연기 등을 밀어내면 배기(排氣), 그런 파이프는 배기관(排氣管)이다.

대표적인 쓰임새 중 하나가 배구(排球)다. volleyball을 왜 排球(배구)라는 한자로 번역했을까. 지금은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는 구성인데, 이들 선수들은 두 열로 나뉘어 자신의 코트에 자리를 잡는다. 그 인원이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넘어온 볼을 상대의 코트로 넘기는 경기가 배구다. '밀어내다'에 배열(排列)의 의미가 다 들어 있으니 volleyball의 적합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안배(安排) 또는 안배(按排)로 적는 단어는 순서나 일정 등을 정하는 작업이다. 대열, 또는 순서의 의미로 排(배)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배열(排列)은 그런 대열을 죽 늘어놓는 일이다. 앞줄을 전배(前排), 뒷줄을 후배(後排)로 적는다.

排芳(배방)이라는 역명의 다음 글자 芳(방)은 꽃이나 풀 등의 향기를 가리킨다. 아울러 그런 꽃이나 풀 등 화훼(花卉)를 일컫기도 한다. 더 나아가 아름다운 여인, 사람이 쌓은 덕망(德望)을 형용하는 뜻도 얻었다. 방초(芳草)라고 적으면 향기가 나는 꽃다운 풀이다. 방향(芳香)은 그런 좋은 풀에서 나는 향기다.

여인을 가리킬 때도 자주 등장한다. 방명(芳名)이라고 적으면 여인의 이름이다. 방년(芳年)은 여자의 나이다. “방년 몇 세이신가?”라고 묻는 경우가 과거에는 흔했다. 방령(芳齡)도 같은 뜻이다. 방용(芳容)은 꽃다운 얼굴, 즉 여자의 모습을 형용하는 단어다. 방심(芳心)은 여인의 마음, 방백(芳魄)은 여인의 혼백(魂魄)을 가리켰다.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자면 ‘오랜 세월(萬古) 흐르는(流) 향기(芳)’다. 그러나 속뜻은 한 사람이 남긴 덕망이나 아름다운 업적이 길이길이 오래 남는 일을 가리킨다. 芳(방)을 사람의 덕이나 업적에 비유한 경우다. 만세유방(萬世流芳), 유방천고(流芳千古) 등으로도 쓴다.

그러니 排芳(배방)이라는 역명은 보기에 우선 좋은 이름이다. 향기와 덕망, 아름다움(芳) 등을 뿜어내는(排) 뜻이라서 그렇다. 남에게 알듯 모를 듯 그런 향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 은은하게 속 깊은 곳에서 번져 나오는 그런 향기를 지닌 사람이 많아야 좋다. 그런 사람이 도처에 있으면 방향제(芳香劑) 회사 수입은 줄어들겠으나, 우리가 사는 이곳의 분위기는 정말 좋아지겠지….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도서출판 책밭, 2014년 중에서-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