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6.16 14:13
영화 '음식남녀'의 포스터.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남녀 사이의 사랑은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이라고 했던 고대 전적 <예기(禮記)>의 지적처럼 먹는 일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다.

잠은 한데 자도 밥은 함께 먹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도시락을 싸든, 급식을 받든 점심때가 되면 삼삼오오 모여 반찬을 나누며 한 상 가득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사람의 일이란 대개 이렇듯 밥상머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리라. 식탁에서 떨어져 혼자 먹는 밥은 마치 같이하는 동료와 친지들의 삶에서 떨어진 느낌을 준다. 특히 같이 먹는 상황에서 혼자만 떨어져 있다면 비참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혼자 먹는 밥, ‘혼밥’이 싫다.

먹는 일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먼저는 먹는 즐거움이다. 이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마찬가지다. 다음은 사람만이 갖는 식탁의 즐거움이다. 이 때 우리는 음식 뿐 아니라 같이 식사를 하는 상대방과 맺는 다양한 상황을 즐긴다. 아마 인간 문명의 가장 찬란한 결실 중 하나가 식탁일 것이다.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눌 때 우리는 음식을 먹는 자연적인 욕구를 넘어 함께 즐기며 향유하는 문화로 변모한다. 즉 식탁에선 음식으로 시작하여 대화로 끝이 난다. 날것이 요리의 과정을 거쳐 음식으로 변하는 것처럼, 먹는 행위는 대화와 소통으로 진화한다.

하지만 혼밥은 의외로 흔한 현실이다. 동물의 왕국에선 집단 사냥을 하는 사자나 하이에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혼자 숨어서 먹는다. 반면 섹스는 공개적이다. 반면 사람의 식사는 공개적이나 섹스는 비공개적이다. 그래서인지 길거리에서 거사를 치르는 개들을 만나면 민망하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처럼 공개적으로 밥을 먹는 동물을 만나면 민망해 할지도 모른다.

공개적인 식사도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난다. 큰 식탁에 모여 같이 밥을 먹는 경우와 좌식으로 자그마한 개다리소반에 각상(各床)을 받는 일이 그것이다. 대체로 서양이나 중국에서는 테이블이나 원탁에 둘러 앉아 같이 먹는 관습이 있다. 반면 우리나 일본에서는 대부분 같이 모여도 개다리소반에 각상을 받아 말도 없이 먹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 조차 겸상(兼床)은 드물었다.

일본이나 우리가 혼밥을 하는 것은 좌식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계급에서 비롯하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가족 안에서 조차 계급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부부간, 부자간, 동급생간에도 계급이 있었다는 말이다. 특히 계급이 높은 사람의 각상이 뚜렷했다. 양반이 따로 밥을 먹는 건 소통과 대화보다는 계급적 우위가 먼저라는 말이다. 특히 식탁에서의 대화는 금지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통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양반의식이나 계급의식은 함께하는 인간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계급은 우리를 각상 받는 외톨이로 만든 야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같이 모여 먹기 시작했다. 서양식 입식문화의 영향이기도 있겠지만 사회를 지탱하던 계급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도 처음에는 다른 계급, 낯선 타인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이 어색했다. 그러다 차츰 익숙해져 테이블의 즐거움을 알았다. 특히 학교에서 점심은 즐거움이다. 학교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평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탁문화가 정착하기 쉬웠다. 이리 보자면 학교의 효능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을 만들어 낸 점심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를 함께 아우르던 인간적인 식탁문화도 끝나가는 듯싶다. 사회가 혼밥을 피할 수 없게끔 흘러간다는 말이다. 원인은 다양하다. 같이 모여 밥 먹고 떠들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계급이 다시 등장하면서 대화와 소통이 막고 있기 때문이라 보인다.

평등한 학교에서조차 일짱과 빵셔틀이 있다. 그 중 왕따는 같이 밥을 먹어서는 안 될 불가촉천민이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사회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혼밥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고귀한 양반이 각상을 받았지만 이제는 사고무친(四顧無親) 외톨이기에 혼밥이다. 새로운 계급이 자리 잡은 곳엔 동물같이 슬픈 혼밥만 남는다. 그래서인지 혼밥이 싫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