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6.23 16:15

(3) 북진의 대열-2

[뉴스웍스=유광종기자] > 서울까지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북한군의 저항은 세지 않았다. 이미 커다란 대오가 무너진 뒤였기 때문이다. 서울을 향해 진격한 미 해병들이 1950년 9월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산발적인 저항은 없지 않았으나 이미 사위어가는 촛불과도 같았다. 미군은 곧 서울을 점령했고, 서울의 정치 중심인 중앙청에 마침내 태극기가 올라갔다. 

 

> 미군 전차가 서울에 들어선 뒤 북한군 잔적(殘敵)을 소탕하는 장면이다. 서울 수복 직전의 사진으로 추정한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세가 크게 높아지고 있었다. 이제 어디까지 진출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38선을 돌파해 평양으로 곧장 치닫는 일은 당연했다. 그러나 한국의 희망이 그랬다는 것이다. 유엔군을 이끄는 미군의 입장에서는 다소 우려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북한의 배후를 받치고 있는 소련과 중국의 입장 때문이었다. 38선 돌파는 둘의 염려를 자극해 확전의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기도 했다. 

 

> 1950년 9월 28일이 공산군 치하의 서울을 자유 대한의 품으로 다시 안는 수복식이 열린 날이었다.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경축의 자리였으나 계산은 서로가 복잡했다. 38선을 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곧장 북진에 이은 평양 점령, 나아가 통일까지 바라고 있었다. 자유 대한 모두의 염원이기도 했다. 맥아더 또한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그를 바랐다. 그러나 미 행정부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멈추느냐, 아니면 더 나아가느냐를 두고 복잡한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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