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6.24 17:38

죽느냐 사느냐 전쟁터의 리더십

[뉴스웍스=유광종기자] > 김일성의 전격적인 기습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가장 큰 위기로 흔들릴 때다. 부산으로 상륙해 1950년 7월 5일 경 급히 대전역에 도착한 미 24사단 스미스 대대의 모습이다. 

 

> 이 무렵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8군의 사령관도 전선에 도착한다. 월튼 워커(Walton Walker) 중장이다. 워커 사령관(왼쪽)이 대전 지역으로 이동한 뒤 거의 같은 무렵에 도착한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워커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전차전을 획기적으로 이끈 패튼 장군의 수제자에 가깝다. 용맹이 뛰어났고, 교착한 전선의 돌파에 능했다. 그는 맥아더 일본 주재 극동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1950년 7월 급히 한국 전선에 도착했다. 

 

>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 김일성 군대는 여세를 몰아 줄기찬 공격을 벌였다. 한국군과 급히 상륙한 미 8군은 낙동강 전선을 형성해 적을 맞았다. 워커는 “사수(Stand or die)!”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그 무렵의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이동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 전선을 누비던 워커 사령관이 부산으로 보이는 지역에 도착한 미군 부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워커 사령관의 지휘로 전세는 더 악화하지 않았다. 용기와 뚝심을 보여주며 전선을 누볐던 그의 지휘가 크게 빛을 발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낙동강 전선이 뚫리면서 아군은 북상을 시작했다. 워커는 대한민국이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전선에 나타나 그를 잠재운 지휘관이다. 

 

> 낙동강 전선이 가장 크게 휘청거릴 때가 1950년 8월 초순이었다.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이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축선을 위협했다. 그곳을 막았던 이는 한국군 1사단의 백선엽 준장. 이곳이 뚫리면 대구에 이어 부산을 내줄 판이었다. 대한민국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순간이었다. 10여 일의 북한군 공세를 막아낸 한국군 1사단 사령부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지프 앞좌석 앉은 이), 미 8군 전선 사령관 워커 중장(그 뒤 기관총 좌대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왼쪽으로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서 있다. 

 

>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공세를 모두 꺾고 북상하던 무렵인 1950년 9월 중순 무렵의 백선엽 1사단장이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모두 3차례에 걸쳐 워커 중장을 만났다. 그리고 여러 번 통화하면서 작전을 협의했다. 계급의 차이는 있었지만, 피로써 맺어지는 전우(戰友)였던 셈이다. 

 

>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급서한다. 의정부 인근에서 급히 트럭을 피하다 맞은 교통사고 때문이다. 그 직전 워커 사령관은 함께 한국전선에 참전한 아들 새뮤엘 워커의 훈장 수여식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워커는 3성 장군까지 진급했다가 2015년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생전 사진이다. 

 

> 2016년 6월 23일 서울 용산의 미 8군 사령부 건물 정문 앞이다. 이제 96세의 고령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6.25전쟁 기념을 위해 한국을 찾은 미 참전 용사 및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한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 그들은 실내에서 고령의 백선엽 장군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맨 왼쪽이 월튼 워커 사령관의 손자 샘 심스 워커 2세, 그 옆으로 손부(孫婦), 다시 그 오른쪽의 젊은이 둘은 워커 사령관의 증손자 월튼 해리스 워커 3세 등이다. 앞의 휠체어에 앉은 이는 백선엽 장군이다. 한국과 미국의 60여 년 전 혈맹의 우의는 이렇듯 잔잔하지만 힘 있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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