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6.28 16:25
열린 창문의 모습이다. 1호선 개봉역에 등장하는 開(개)라는 글자는 우선 문이나 창문 등의 열림과 닫힘의 상태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열림과 닫힘, 나아감과 물러섬 등은 같은 맥락의 개념일 수 있다.

이곳 일대에 있던 ‘개웅’이라는 이름의 마을과 ‘매봉’이라는 산 이름의 한 글자씩을 따서 개봉(開峰)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개웅 마을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과거 한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총탄이 날아가면서 개웃개웃거리며 이곳을 비켜 지나갔다는 데서 생긴 명칭이라고 하는데, 확실치가 않다. ‘개웃개웃’은 고개 등을 조금씩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표현이다.

순우리말이 그대로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니 우리의 관심은 오늘날의 이름에 붙은 한자에 기울이는 게 좋겠다. 첫 글자 개(開)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글자다. 문을 열다, 닫힌 것을 열어 젖히다의 원래 뜻에서 ‘시작하다’ ‘벌이다’ 등의 다양한 의미로 발전했다.

우선 ‘처음’이라는 뜻을 지닌 시(始)라는 글자와 함께 붙이면 ‘개시(開始)’다. 우리가 더 자주 쓰는 ‘시작하다’와 같은 뜻이다. 역시 ‘열다’라는 한자어 벽(闢)과 함께 붙이면 ‘개벽(開闢)’이다. 하늘과 땅이 열리는 일, 즉 세상이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바로 ‘천지개벽(天地開闢)’이다. 모두 문을 처음 여는 동작과 관련이 있다. 문을 닫아거는 일이 폐쇄(閉鎖), 그 반대가 개방(開放)이다.

그래서 일을 처음 벌이는 경우에도 이 글자는 많이 등장한다. 무슨 일인가를 여는 일, 우리는 이를 개최(開催)라고 적는다. 먼저 나아가 한 지역에 손을 대면 개발(開發)이거나 개척(開拓)이다. 몽매함을 벗고 새로움을 받아들여 자신을 발전시키는 일이 개화(開化)다. 회의를 열면 개회(開會), 그 반대면 폐회(閉會)다. 그래서 열고 닫는 일은 개폐(開閉)라고 적는다. 이 글자를 활용한 단어는 아주 많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성어가 제법 그럴듯한 게 있다. 우선 ‘계왕개래(繼往開來)’다. 우리 문장에서도 이 말은 가끔 쓰인다. 지나간 일(往)을 이어받아(繼), 앞으로 올 미래(來)를 개척한다(開) 식의 엮음이다. 우리는 가끔 옛것을 극단적으로 찬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그래서 과거의 유산을 보는 눈이 아무래도 정서적이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좋은 가르침을 제대로 얻지 못한다.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눈으로 과거를 살펴야 그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제로베이스(zero base)에서 시작이다. 미래를 제대로 개척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과거는 현재의 토대, 그로부터 의미 있는 새김을 이끌어 내 미래 계획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나 긍정은 모두 옳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보도록 노력해 앞으로 나아갈 길과 방향을 잡는 데 활용해야 한다. 성어 繼往開來(계왕개래)는 그 중요성을 말해주는 내용이다.

개원절류(開源節流)라는 성어도 자못 의미가 깊다. 물의 원천(源)을 열거나 개발하고(開), 물의 흐름(流)을 줄이라(節)는 식의 엮음이다. 국가나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타개할 원천의 개발에 나서되, 자원 등을 이용하는 양과 폭은 가급적 줄이라는 충고다. 기업이 경영의 어려움에 놓일 때 그 수익의 원천을 늘이되, 씀씀이는 줄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시야를 아래위로 움직여 산을 보면 그게 봉우리, 한자로는 봉(峰)이다. 아래위가 아닌 옆으로 그 산을 보면 어떨까. 여기에 그 소감을 적은 소동파(蘇東坡)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한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知廬山眞面目(부지려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한시(漢詩)라서 어렵다고만 생각할 것 없다. 아주 유명한 시는 한 번 눈으로 감상하는 게 좋다. 그 구성을 풀어가 보자. 옆으로(橫) 보니(看) 산맥(嶺)을 이루고(成), 아래위(側)로는 봉우리(峰)를 이룬다(成)/ 멀고(遠) 가까움(近), 그리고 높고(高) 낮음(低)이 각기(各) 다르구나(不同)/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 없으니(不知)/ 단지(只) 몸이(身)이 이(此) 깊은 산(山中)에 갇혀 있기(在) 때문이리라(緣).

소동파는 본명이 소식(蘇軾)이다. 북송(北宋) 때의 문인이자 관료다. 그 이름이 아주 높다. 중국 전통 시단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호(文豪)다. 그 소동파가 크고 우람하며, 절경으로 이름이 높은 지금 중국 장시(江西)성의 여산에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마침내 ‘도대체 이 산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뱉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깊은 산중에 갇혀 전체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유명한 단어가 ‘진면목(眞面目)’이다. 우리도 자주 쓰는 한자 단어다. 이 소동파의 시는 철학적 사유를 담았다. 대상이 비록 가까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있다. 開峰(개봉)의 역명을 풀이하다가 너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열어젖힘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맞는 그 開(개)라는 글자와, 여산의 수많은 봉우리 앞에서 탄식을 금치 못하던 소동파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봉우리’는 우리가 넘어야 할 인식의 봉우리인지 모른다. 그리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스스로를 성찰해야 방향을 제대로 잡아갈 수 있다. 대상이 지닌 ‘진면목’에 제대로 눈을 뜨려면 우리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開峰(개봉)이라는 한자 역명에서 값어치 있는 ‘의미’를 건지자면 그런 내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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