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5.11.02 17:07
송재혁(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

난데없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혼란이 BBC, 뉴욕타임즈, 알자지라 등 해외 언론의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독일의 유력지 ‘베를리너 타게스차이퉁(Berliner Tageszeitung)’의 10월 15일자 기사 제목은 얼굴마저 화끈거리게 한다. ‘진짜 진실(Die wahre Wahrheit)’이라는 풍자적인 제목의 기사에서 “자국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교재는 거의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출판물은 ‘올바른 교과서’로 지정될 것이다. 마치 하나의 정답만을 다루려는 수학 수업처럼”이라고 비꼬고 있다. 친일파 문제, 한국전쟁 중 시민 학살, 군 독재자에 의한 고문 등 흐지부지 넘겨버리고 싶어 했던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수파는 ‘매저키스트적 역사이해 방식’으로 규정한다고 전하면서, 대통령이 자신의 가정사를 깨끗이 씻으려 한다고 우려하는 비평가들의 견해도 소개했다. 검인정 체제를 넘어 자유발행제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보니, 한국의 ‘역사 내전 상황’이 해외의 시각에서 기이하게 여겨질 법도 하다.

국정 교과서를 쓰는 극소수 나라 중 하나인 베트남은 올해 국정제를 폐지했다. 2013년 국제연합(UN) 총회에 제출된 보고서는 역사교육이 애국심 강화, 민족적인 동일성 강화, 공적인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젊은 세대 육성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역사교과서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1992년에 국정제보다 검인정이, 검인정보다는 자유발행제가 낫다고 했다. 국정교과서에 의한 역사교육은 유신시대에 도입되었으나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청산되었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은 이러한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폐휴지는 폐휴지통에 넣어야 정상인데, 이미 버린 폐휴지를 꺼내어 코팅을 하려 드는 것이다. 시대정신과 세계적 추세를 역행하는 국정화는 ‘상식’에 대한 ‘몰상식’의 도전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할 것이다.

국정화 추진자들은 역사학자와 현장교사 대다수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있다. 동원되는 저열한 흑색선전은 극단적인 사회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국정화에 반대하면 ‘적’으로 몰아붙이는 의도된 이념전쟁의 전장에 중세적 마녀사냥의 광기가 흐르고, 박정희 독재자와 유신 철권통치,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ZI)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나오지도 않는 교과서를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로 일컫는 것은 부당하며, 역사 왜곡이 담긴다면 스스로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주장하고 설득하는 것이 정치이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주장했던 과거의 발언 기록은 유신독재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기록하는 교과서를 점치게 한다. 또한 일본제국주의를 경제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녹여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뉴라이트 ‘교학사 교과서’를 지지했던 세력이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으니, 국정교과서는 미리 본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를 세탁하고 싶은 친일과 독재의 후손들은 친일과 독재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거나 미화하려 들 것이다.

국정화 추진자들의 ‘자학적’ 역사관 극복 주장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과오를 덮어버리면 되풀이되는 법이다. 독일이 나치의 범죄에 대해 대대손손 교육하는 것은 모범적인 모습이며, 우리는 일본에 이러한 역사교육을 촉구해왔다. 친일·독재 은폐 국정 교과서를 갖게 된다면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왜곡을 비판할 근거를 잃게 된다. 친일을 친일이라 말하지 못하고 독재를 독재라고 가르치지 못한다면 역사교육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과 반제국주의‧반독재 투쟁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한다면 이는 곧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이토록 교육의 내용성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민주화 쟁취 이후 처음일 것이다. 교육을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킬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는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폭거이다. 역사의 퇴행을 막으려면 잠이 들 때에도 눈을 뜨고 생각을 켜 놓을 일이다.

송재혁(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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