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7.05 16:06

(3) 북진의 대열-3

>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신중함과는 달리 국군은 38선 돌파에 주저함이 없었다. 1950년 10월 1일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38선을 넘어서고 있는 국군 3사단과 그를 축하하는 유엔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나중에 한국 정부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그야말로 ‘추풍(秋風)의 낙엽(落葉)’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를 찔리고 만 김일성 군대는 급격히 무너지면서 전혀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병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국군 1사단의 북진 모습이다. 대오를 갖춘 채 걷고 또 걸어 하루빨리 평양을 적으로부터 탈환해야 하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미 1기병사단이 선두를 다퉜다. 그들은 1000여 대의 트럭을 동원해 빼어난 기동력으로 평양 탈환의 선두에 올라섰다. 국군 1사단은 당초 평양 공격의 대오에서 빠져 있었다. 미 8군의 작전계획에서 누락됐던 것이다. 8군 예하 미 1군단장을 간곡히 설득해 국군 1사단은 평양 공격 대열에 가까스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사단 보유 트럭이 100여 대에 불과한 국군 1사단이 그 열 배에 달하는 트럭을 보유한 미 1기병사단과 경쟁을 벌이기에는 체력이 크게 달렸다. 그러나 자존심의 문제였다. 국군 1사단은 미군이 휴식을 취하는 밤에도 길을 걷고 또 걸었다.  

 

> 아군의 북진에 낙오한 북한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 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다. 북한군은 전혀 반격을 하지 못했다. 개전 3개월 여 동안 체력이 소진한 탓이었다. 그들은 이후 6.25전쟁의 축선에 전혀 설 수 없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변변치 않았지만 북진에 나선 한국군과 미군의 경쟁은 서로 양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양을 점령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한국군으로서는 미군에게 평양 점령을 내주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소리 없는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전쟁은 그런 명예를 부추기기도 한다.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군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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