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7.07 10:33
청춘 남녀의 사랑과 희망, 뜨거운 마음 등을 잘 그려낸 곽지균 감독의 2000년 영화 '청춘'의 포스터."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있지만 청년세대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몸빵이 제일 싸다는 대학 동아리의 전설이 있다. “장비가 고장 나면 돈 들지만 몸이 고장 나면 저절로 낫는다”는 것이다. 뻥이다. 빛바랜 전설이다. 저절로 낫는 일은 없다. 몸이 돈 먹는 하마다. 정신 차려라! 이제는 정신이 아니라 육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제목으로 한 책도 있고 한 때 유행도 탔다. 예민한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다룬 좋은 책이다. 하지만 제목이 엉터리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다. 아직도 무당이 병을 고친다고 말하려는가? 다 알 것이다. 진료는 의사가, 약은 약사가, 굿은 무당이 한다.

사회적 건전성의 적신호라고 할 수 있는 ‘88만원 세대’라는 진단이 나온 지 어언 10여년이 지났다. 어찌된 노릇인지 그 때나 지금이나 청춘은 여전히 88만원 임시직 알바다. 조금은 미안한지 일본의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를 빌려다 ‘달관세대’라는 이름으로 금칠해준다.

심지어 배부른 자기와는 달리 일자리는 없고 돈 적게 벌어도 스스로 깨달아 만족할 줄 아는 젊은이라 치켜세워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리 자발적으로 달관할 수 있는 초식동물이 아니다. 초식을 하려면 적어도 위장을 4개는 가져야 한다. 따라서 한국도 달관할 사회가 아니다.

의사들은 이미 신자유주의로 인한 병증을 진단하고 젊은 세대의 안정적 취업과 임금을 그 처방으로 내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약국에서 조제를 거부한다. 그 사이 병은 더 깊어져 취업률은 더 추락하고, 임시직만 늘어난다. 알바의 관심은 자기실현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이란 가장 낮은 수준의 생활이고 노동이자 서비스다. 그러다보니 모든 게 최저로 떨어진다. 모든 것이 최저라 헬조선이다.

발버둥을 쳐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하다. 불안하면 절망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절망이다. 불안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환자는 삶의 희망을 내려놓는다. 불안과 절망, 죽음이 모두 개인적인 사건이라 여긴다. 사실도 현실도 아니다. 불안과 절망은 세상을 향한다.

어떤 희망도 의지도 느끼지 못하는 절망의 환자는 세상을 내려놓는다. 청춘인데도 아파야 할 일에 아프지 않다. 삶에 빛을 주던 감성은 푸석푸석하다. 국가나 공동체도 의미 없다. 도덕이나 의무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 어디라도 좋다. 무슨 일이라도 그저 조금 더 주는 알바를 따라 갈 뿐이다. 그렇게 죽어간다.

우리는 불안과 절망에 죽어가고 있다고 의사가 처방을 해도 약사는 오리발이다. 의사로서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이 절망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바로 힐링, 멘터링 그리고 사이비 인문학이다. 푸닥거리다.

청춘이건 노인이건 아프면 환자다. 환자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검사와 수술을 받고 주사 맞고 약을 먹어야 병을 이긴다. 저절로 낫는 다른 길은 없다.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다음이라면 무엇을 해도 좋다. 병실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멘토의 가르침을 따라 명상을 해도 좋다. 횡액을 피하기 위한 굿을 해도 무방하고 인문학 콘서트에서 열광해도 괜찮다. 다 약 먹어 낫고 나서의 일이다.

환자에게 치료를 대신해 자기개발서나 멘토링 또는 엉터리 인문학을 권하면 재앙이다. 조기치료를 거부하고 푸닥거리하다 죽은 스티브 잡스 꼴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이 바로 그렇다. 약사가 약을 공급하지 않아서 의학적 방도가 막혔다. 현실적인 방도가 없다고 민간요법, 힐링이나 멘터링 같은 사이비 인문학 굿거리가 머리를 들이 민다. 침이나 발라주는 푸닥거리 힐링이나 사이비 인문학은 모두 마약이다. 병을 더 악화시켜 고통만 키울 뿐이다. 차라리 술이 낫다.

힘들더라도 운동을 통해 면역력을 키우고, 조금은 험하더라도 고통을 직시하고 올바른 치료책을 하나씩 마련해 나가는 게 바른 길이다. 아니, 약국을 털어야 할까?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