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7.11 15:25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발언이 잇따른 화제를 낳고 있다. 과거의 압제적인 신분제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응분의 책임이 따라야 할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라 했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이 개돼지 키우기와 같다는 말이다. 일부 개돼지는 화를 내고 일부 개돼지는 찬성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찬성과 반대는 평범한 개돼지가 하는 일차원적 반응이다. 이를 넘어서는 이성적인 개돼지도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 개돼지다. 『이솝우화』도 우화라 다 짐승으로 빗댄다. 민중을 개돼지로 여겨 온 역사가 유구하다는 말이다. 역사를 읽을 때도 그렇다. 민중을 개돼지로 놓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고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역사란 엘리트가 엘리트의 입장에서 민중을 개돼지로 놓고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엘리트를 뛰어넘는 비판적인 개 눈깔도 필요한 때다.

국가란 힘을 결집한 권력집단이다. 권력은 왕권과 시민권, 정부 및 국가제도와 기관을 만들어 낸다. 왕이 권력의 최고점에 있을 때 온 백성은 신하이거나 개돼지(臣民)다. 이 때 왕은 가족 같은 엘리트 귀족은 예절로 대하고 개돼지나 다름없는 국민은 형벌로 다스렸다. 따라서 신하에게는 폼 나는 사약을, 개돼지에게는 공개적으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안겼다. 무식한 전근대적인 사고다. 그럼에도 아직도 학교체벌이나 사형제도 옹호 같은 생각을 하는 엘리트들이 있다.

사약을 내리거나 목매다는 형벌로만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다. 그래서 왕은 귀족이나 목민관(牧民官)이라는 엘리트를 파견하여 개돼지를 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목(牧)이란 글자가 맘에 안 드는 이유다. 그가 아무리 백성을 위해 당근을 준다고 말해도 결국 그는 목자(牧者)고 우리는 개돼지였다. 엘리트치고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개신교의 사제를 목사(牧師)라 한다. 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며 목사를 모셔 두고 설교를 듣는다면 그대는 양이거나 개돼지다. 목사는 교구의 신도들을 관리하고 신도들의 개인적 정보를 이용해 개돼지를 자기가 원하는 길로 이끈다. 왕과 달리 목사는 때리거나 사지를 찢어 죽이지 않는다. 대신 때 되면 양털 깎기를 하고 배고프면 한 마리씩 잡아먹을 뿐이다. 목사가 양을 자선으로 키우는 건 아니다.

세상이 다시 변했다. 쉴 만한 물가를 보장하던 교회의 천국보험은 한 물 가고 이제는 의료보험의 시대다. 교회는 신도들의 영혼을 기르고 가르쳤다면 의사는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관리한다. 그렇다. 의사야 말로 현대의 목사다.

의료보험은 건강검진을 하라고 한다. 정보가 권력인 시대다. 의료보험에게 국민이란 바로 몸무게, 체질량이자 혈압이고 혈당이며 질병기록이다. 의사는 붉은 색 수치를 들이대며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병을 만들어서는 치료를 위해 입원토록 하거나 혹은 격리한다.

작년 전염병 메르스의 확산에서도 중심은 의료기관이었다. 오늘날 국민 모두의 신체-정신적 정보를 주관하는 기관은 의료기관이다. 이 정보를 통해 국민의 활동, 식생활, 성생활, 음주, 흡연 등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육체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에까지 정상 수치를 들이댄다.

하지만 우리에게 의료는 절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자본주의가 있다. 사시나 행시 같은 국가고시를 봐야만 자격을 갖는 시대도 종쳤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귀족제, 조선의 과거제 그리고 공산당의 다 끝난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교육부의 개돼지-엘리트 정책은 너무 천진난만하고 조선(朝鮮)스럽다. 한 마디로 교육부의 엘리트 양반주의는 망발이다.

변호사가 필요하면 변호사를, 의사가 필요하면 의사를 사는 시대다. 지식은 널렸고 엘리트건 정보건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일 뿐이다. 1%엘리트가 필요하면 사면 그만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엘리트가 개돼지를 치고 이끌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개돼지가 엘리트를 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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