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7.18 16:22
중국의 얼굴이랄 수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바라본 옛 명청시대 황궁 자금성의 천안문이다. 늘 세상의 가장 복판인 '중(中)'을 지향하는 문화적 심리가 돋보이는 나라다.

우리 지명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이어서 행정구역의 위치로 볼 때 중간을 차지하는 곳에 보통 이런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가운데 마을’은 ‘간뎃말’ ‘간데미’ ‘간담말’ 등의 순우리말로도 불리다 나중에 한자 이름 中洞(중동)으로 정착했으리라.

이 이름 전의 한자 명칭은 중리(中里)인 적도 있었는데, 한때는 부평에 속했다가 나중에는 소사로,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면서 부천이 시로 승격하면서 그곳의 한 부분인 현재의 中洞(중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위치로 볼 때 가운데에 놓여 있어 주변이 커지면 그쪽으로 따라서 편입했던 곳일 테다.

이름 앞 글자 中(중)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다. 누구나 다녔던 중학(中學)이란 글자에서부터 처음과 끝, 혹은 앞과 뒤의 가운데를 뜻하는 중간(中間)까지 이를 써서 만든 단어의 수가 매우 많다. 이 글자에 매우 강한 집착을 보이는 나라가 바로 중국(中國)이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에서 나라 이름도 그렇게 부른다. 그보다 더 큰 자부심이 든 단어가 중화(中華)다.

가운데 中(중)과 ‘빛이 난다’라는 새김에, 꽃을 비롯해 사물의 정수(精髓)를 가리키는 華(화)라는 글자가 덧붙었다. 자신의 문명을 세계의 으뜸이라고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명칭 못지않게 기름기 많은 짜장면 등 ‘중화요리(中華料理)’로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으니 흥미롭다.

중국과 중국인의 中(중)이라는 글자에 대한 집착은 문화적인 현상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인의 사고형태를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가운데 그들의 행위와 사고에서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선수’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중용(中庸)이다. 이 中庸(중용)을 해석하는 갈래는 다양하지만, 크게 정리하자면 ‘가운데를 향함’이다.

넘치지도 않으며, 아울러 모자라지도 않아야 좋다는 사고다. 빠르지도 않으며, 또 늦지도 않아야 한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 가운데에 서서 전체적인 흐름을 보며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그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른다. 뭐, 이런 식이다.

달은 차고 기운다. 보름에는 꽉 찼다가, 그 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조금씩 허물어진다. 차고 기우는 일이 영허(盈虛)다. 달이 차고 기우는 현상, 그 반복 내지는 끝없는 순환의 이치에서 중국인들은 삶을 관찰하고, 세계를 살핀다. 그러니 늘 복판에 서서 신중하게 사태를 살핀다. 그게 거의 체질화(體質化)했다고 봐도 좋다.

아무튼 중국은 나라 이름, 문화적 바탕에서 우선 그렇게 中(중)이라는 글자를 사랑하고 아낀다. 때로는 존경하며 흠모한다. 그 가운데 올바로 서는 사람을 가장 현명하다고 여기며, 때로는 ‘지혜(智慧)’라는 이름까지 거기에 붙인다. 中(중)을 사랑하는 中國(중국)이고 中國人(중국인)이다. 그 점은 나중에 다시 살피도록 하자.

다음 글자 洞(동)은 역시 우리가 잘 쓴다. 일반적인 행정구역 명칭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시(市)와 구(區), 그리고 그 아래가 洞(동)이다. 도시 지역이 아니면 대개가 읍(邑), 면(面), 리(里)가 등장한다. 洞(동)을 행정적인 명칭으로 쓰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다. 사전 등을 보면 대개 고려시대에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나온다.

이 글자의 초기 뜻은 ‘사물의 움푹 파인 곳’이다. 그래서 산에 파인 구멍을 우리는 동굴(洞窟)이라고 적는다. ‘빨리 흐르는 물’의 의미도 있었으나,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밝다’ ‘뚜렷하다’의 새김도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본다고 할 때 쓰는 ‘통찰(洞察)’이라는 단어의 경우다. 이때는 발음이 ‘통’이라는 점 기억하자.

비슷한 뜻의 통촉(洞燭)도 알아두면 좋다. TV 사극 등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통촉하시옵소서” 할 때의 그 통촉이다. 洞燭(통촉)은 우선 밝은 촛불, 또는 밝은 불의 뜻이다. 아울러 ‘뚜렷하게 살피다’라는 뜻도 있다. 드라마 대사에서 나오는 洞燭(통촉)은 뒤의 새김이다. 燭(촉)은 대표 새김이 ‘촛불’이지만, 여기서는 ‘꿰뚫어 보다’라는 의미의 동사다.

동천(洞天)이라는 단어도 있다. 신선(神仙) 등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일으키는 분란(紛亂)이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일컫는 용어다. 우리의 쓰임새도 있기는 하나, 도교(道敎)의 영향이 남아 있는 영역에서만 한정해서 쓰인다. 별유동천(別有洞天)이라는 성어도 있다. 달리(別) 있는(有) 洞天(동천)이라는 뜻인데, 경치 등이 매우 빼어나 신선 등이 살 법한 곳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에서 읊은 이 구절을 흉내 낸 듯한 표현이다.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달리(別) 있는(有) 하늘과 땅(天地), 이곳이 사람 사는 세상(人間)이 아니다(非)는 뜻이다. 그렇게 사람은 늘 제 마음속에 이상적인 곳을 꿈꾼다. 그만큼 세상이 일으키는 물결, 세파(世波)가 거세다는 얘기다. 파라다이스, 샹그릴라, 낙원(樂園)과 낙토(樂土)…. 이 세상을 그런 이상향(理想鄕)으로 바꾸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으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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