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7.22 10:36
조조와 유비가 활동했던 삼국시대 오(吳)나라 명장 육손(陸孫)의 화상. 유비의 말년 명운을 재촉했던 뛰어난 전략가 기질의 관료였다. 그는 지금 상하이에 봉지를 받고 활동한 인물이다.

화정(華亭)이라는 이름도 있다. 삼국시대 조조(曹操)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나라와 대립각을 형성했던 나라가 오(吳)다. 이 오나라에는 유명한 장수가 여럿 있었다. 주유(周瑜)가 우선이고, 노숙(魯肅)과 여몽(呂蒙)이 뒤를 따른다. 촉나라 유비는 인생 막바지에 커다란 전쟁을 벌인다. 촉나라 군사를 대거 거느리고 장강의 三峽(삼협)을 빠져 나와 이릉(夷陵 지금의 宜昌 동쪽)이라는 곳에서 운명의 결전에 임한다.

유비를 맞이한 오나라 장수가 바로 육손(陸遜)이다. 육손은 그 이릉의 대전에서 우선은 밀리는 척한다. 중요한 전략 거점을 먼저 내주고 유비의 막강한 군대가 처음에 지녔던 예기(銳氣)가 꺾이기를 기다린다. 그 다음에 유명한 화공(火攻)을 펼쳐 유비의 군대에 막대한 패배를 안긴다. 유비는 백제성(白帝城)으로 쫓긴 뒤 결국 자신의 아들을 제갈량에 맡긴다는 ‘탁고(托孤)’의 일화를 남기고 죽는다.

그 육손은 오나라 왕실에 의해 화정후(華亭侯)에 봉해진다. 육손이 자신의 봉읍(封邑)으로 거느렸던 곳이 바로 상하이, 또는 그 인근이다. 따라서 상하이는 별칭으로 ‘화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상하이의 이름이 이렇게 많다. 한적한 어촌이라는 의미, 전국시대 화려하게 생활하며 수많은 식객을 거느렸던 춘신군, 유비를 절명케 한 전쟁의 주역인 육손의 그림자 등이 모두 어려 있는 곳이다.

그러나 상하이가 중국인들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그런 춘신군과 육손이 활동하던 시절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다. 1843년 상하이는 문을 열었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문을 열었던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벌어진 아편(鴉片)전쟁이 몰고 온 여파였다. 영국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 왕실은 전쟁에 진 대가로 1842년 영국과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이 지정한 5개의 항구를 개방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하이였다.

그 이후의 상하이시 변천사는 알 사람은 다 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진출해 그 땅을 아예 차지해 버린 조차지(租借地)로서의 역사 말이다. 상하이는 그럼 굴욕의 도시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록 힘에 의해 유럽 열강 등에 땅을 내줬지만 굴욕의 정한(情恨)만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유광종 저, 도서출판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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