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7.23 11:30
1호선 역 부평(富平)에서 생각해 볼 한자가 福(복)이다. 복을 기원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그러나 인생살이에서 복은 늘 화(禍)와 쌍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들이 복을 비는 불상 모습이다.

고구려 때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 신라 경덕왕 때는 장제(長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지역이라고 한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수주(樹州)라는 이름도 얻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부평(富平)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다. 1310년 충선왕(忠宣王) 때라고 한다. 이때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 부평부(富平府)다.

이곳은 평야지대에 속한다. 해발 20m의 벌판이 죽 이어져 있고, 옆의 아주 넓은 김포(金浦) 평야의 일부에 든다. 더구나 수도인 서울에 바짝 붙어 있으며, 그곳에서 인천(仁川)으로 향할 때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해당한다. 한반도 첫 철로인 경인(京仁)선이 이곳을 지나고 있으며, 경인고속도로 또한 이곳을 거친다. 교통의 요지이며 물류(物流)가 왕성한 곳이어서 이곳은 예로부터 주목받았다.

중국에도 이 富平(부평)이라는 지명이 있다. 2012년 중국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시진핑(習近平)의 고향이다. 중국의 富平(부평)은 산시(陝西)라는 곳에 있다. 이곳 이름의 원래 뜻은 富庶太平(부서태평)이다.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던 富庶라는 단어는 물산이 풍부(富)해서 사람이 많이 있다(庶)라는 뜻이다. 거기에 다시 전란이나 재난 등이 없는 아주 평안한 시절이라는 뜻의 太平(태평)이 붙었다.

평안한 세월에 풍부한 물산, 그를 먹고 자라난 많은 인구-. 중국의 富平(부평)이라는 곳은 그런 뜻을 지닌 성어 식 표현의 준말이다. 지금이야 전란 등이 자주 벌어지지 않아 좋지만, 예전에는 사정이 달랐던 모양이다. 특히 중국은 전란이 빈발하기로는 세계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의 땅이었다. 따라서 이 富平(부평)이라는 단어가 눈물겨울 정도로 반가울 것이다.

여기서 다시 富(부)라는 글자를 뜯어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앞의 부천(富川), 그 다음 부개(富開)를 거치면서 우리는 이 글자 富의 정체를 충분히 살폈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 인천행 구간에서 부천과 부개, 부평의 이 세 역은 ‘富를 돌림자로 하는 3형제’와 같은 신세다.

이 글자는 사실 복(福)이라는 글자와도 통한다. 富(부)가 곧 福(복)이고, 福(복)이 곧 富(부)라고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富(부)가 만인이 모두 바라는 대상일 수 있듯이, 福(복) 또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대개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이다. 따라서 이 福(복)에는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다.

누군가 자기에게 큰 행운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를 “福(복)덩이”라고 일컫는다. 로또라는 이름이 요즘 유행하지만 예전에는 복권(福券)으로 불렀다. 福(복)을 가져다주는 티켓(卷)이라는 뜻이다. 그런 福(복)이 와 닿기를 빌어주는 행위가 바로 축복(祝福)이다. 행운과 함께 내려지는 복이 행복(幸福), 그 수량이 많음이 다복(多福),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면 만복(萬福)이다.

그런 많은 바람과 희구(希求)에도 불구하고 그 福(복)의 본질을 바라보는 철학자의 눈은 냉정하다. 특히 노자(老子)는 일찍이 그 점을 알렸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도덕경(道德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길(新吉)역에서 풀었지만, 여기에 다시 인용키로 한다.

“복이라, 화가 숨어 있음이라. 화라, 복이 기대는 곳.(福兮禍所伏. 禍兮福所倚)”

우리는 흔히 둘을 화복(禍福)이라고 부른다. 둘은 반대다. 하나는 재앙이고, 다른 하나는 즐거움이다. 노자는 그러나 둘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복에는 화가, 화에는 복의 요소가 모두 숨겨져 있다는 얘기다. 하나의 상황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말하기도 한다.

어려운 얘기다. 그럼 우리는 쉬운 스토리로 이를 이해하면 좋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성어 이야기다. 내용은 대강 알고 있다. 간단히 덧붙이자면 이렇다. 변방의 늙은이가 하루는 말을 잃어버렸다. 옛 중국의 이야기이니, 당시 기준으로 따지면 그가 키우던 말은 지금의 에쿠스 자동차처럼 비싼 재산이었겠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웃들이 와서 위로했다.

“귀중한 말을 잃으셨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늙은이의 말이 걸작이다. “지금 말을 잃은 게 행인지 불행인지 어찌 알겠소”다. 이상한 대답 아닌가. 에쿠스 한 대 잃어 버렸으면 난리를 쳐야 정상인데, 늙은이의 태도가 의연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집을 나간 노인의 말은 밖으로 떠돌다가 ‘걸 프렌드’ 하나를 데리고 온다. 잃어버린 에쿠스가 두 대로 변신해 돌아오는 형국. 그러자 이웃들은 또 찾아와 경축한다. 그러나 노인의 대답은 저번과 같았다. “이게 행인지 불행인지 어찌 알겠소”다. 그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다음은 집 나간 말이 데리고 온 걸 프렌드 말을 타다가 노인의 아들이 땅에 떨어져 다리를 접질렸다. 이웃들의 위로가 이어졌다. 그러나 노인의 대답은 전과 같았다. 이어 변방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가 부러진 노인의 아들은 다행히 군에 끌려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진다. 노인이 본 게 맞았다. 말을 잃고, 말을 하나 더 얻고, 아들의 다리가 부러지고, 전쟁이 벌어진다.

그런 모든 상황에 福(복)과 禍(화)의 요소가 다 숨어 있다. 한 번 마주친 상황에서 비탄하거나 낄낄거리며 본분을 잃으면 곤란하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예상치 못한 요소에 대비해야 좋다. 모든 상황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침착하게 긴 안목으로 앞으로 다가올 무엇인가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한자(漢字), 나아가 한문(漢文)의 세계가 펼치는 사고의 자락이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생기는 법, 밝음과 어둠을 함께 아우르는 식의 사고 패턴이다. 그러니 경거망동(輕擧妄動)과는 거리가 멀다. 신중하게 상황의 흐름을 멀리 내다보며 앞으로의 행위를 저울질하는 지혜의 속성이 강하다.

福(복)을 바라보는 시선, 禍(화)에 닥칠 때도 쉽게 거둬들이지 않는 그 신중한 살핌이 어딘가 무게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하니 福(복)이 그저 福(복)이 아니요, 禍(화) 또한 그저 禍(화)가 아니다. 福(복)에서 禍(화)의 요소를 미리 읽고, 禍(화)에서 福(복)의 기운을 읽는다. 어려운 곳에서 밝음을 살펴 움직이고, 즐거운 곳에서는 다가올지 모를 위기에 대비한다. 결국 사람의 의지다.

부천과 부개, 부평의 ‘3富(부) 돌림자 형제’ 역을 지나면서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옳겠다. 禍(화)로부터 福(복)의 요소를 끌어내 어둠을 벗어나고, 福(복)에 이르러서는 그것에 묻히지 말고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는 그런 자세 말이다. 어딘가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은 골병이 든다. 그 점은 富(부)와 福(복)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을 잃어버린 노인’에게서 우리는 이래저래 배울 점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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