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7.22 11:30
말라 비틀어져 곧 땅에 떨어질 가을의 잎사귀다. 숙청(肅淸)은 그런 분위기의 계절, 늦가을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다. 북한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김정은의 북한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 숙청(肅淸)이다. 가끔씩, 때로는 자주 사람 자르고 없애는 일이 벌어진다. 대체 무슨 광기(狂氣)와 오만(傲慢)이 제 수족처럼 부리던 군부의 요인들을 찬바람 닥쳐 마구 떨어지는 낙엽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일까.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숙청(肅淸)이라는 한자 낱말에 눈길이 간다. 뒤의 글자 淸(청)은 물이 맑음을 나타내는 형용이지만, 동사의 뒤에 붙었을 때는 ‘싹 비우다’ ‘죄다 없애다’의 새김이다. 앞의 동사가 품은 동작의 결과를 나타내는 글자다. 그렇다면 肅(숙)은 어떤 곡절을 품은 글자일까.

이 글자의 윗부분을 형성하는 그림은 손으로 빗자루 등을 잡은 모양이라고 한다. 그 아래의 복잡한 모습은 일정한 사회 공동체의 마당으로 본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 글자의 출발점은 일종의 제의(祭儀)와 관련이 있다고 풀이한다. 신성한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그 제의가 펼쳐질 마당을 조심스레 청소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는 처음부터 ‘조심스러움’ ‘경건함’ ‘존경’ 등의 의미를 지니고서 한자(漢字)의 드넓은 바다에 합류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자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조어(造語) 행렬이 대개 그런 맥락이다. 우선 엄숙(嚴肅)이다. 장엄한 분위기, 경건한 기운이 숨어 있는 단어다.

정숙(靜肅) 또는 숙정(肅靜)도 마찬가지다. 경건함과 조용함이 함께 붙어 있는 단어다. ‘쉿, 조용~!’이라고 조금 장난스럽게 적은 도서실의 문구가 떠올려진다. 스스로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다잡으면서 조심하는 행위를 우리는 자숙(自肅)이라고 적는다.

어떤 상태의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 然(연)을 가져다 붙이면 숙연(肅然)이다. 감동적인 일, 또는 퍽 슬픈 일에 마주쳤을 때 일행 모두 아무런 말없이 있는 모습을 그렇게 적는다. 조용하면서 차분한 몸가짐, 마음가짐을 표현할 때는 숙정(肅整)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여기서 整(정)은 다 갖춰져 빠짐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못이 드러난 대상을 바로 잡을 때는 숙정(肅正)이라고 적을 수 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절을 올린다면 숙배(肅拜)다. 절까지는 올리지 않더라도 정중하게 고마움을 나타내면 숙사(肅謝), 그를 더 높여 ‘은혜에 깊이 감사하다’의 뜻을 보탠다면 숙은(肅恩)이다.

그렇다고 마냥 엄숙하고 경건할 필요는 없다. 팔팔 뻗치는 삶의 기운, 즉 생기(生氣)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肅(숙)이라는 글자는 따라서 그런 뜻도 품는다. 가을의 차가운 기운이 닿아 식생(植生) 모두가 생기를 잃는 경우를 우리는 숙살(肅殺)이라고 적는다. 숙청(肅淸)이라는 단어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김일성, 김정일에 이은 김정은의 3대 세습 독재가 횡행하는 곳이 북한이다. 이 억지스러운 권력의 세습이 우리 한반도 북녘 땅의 생기를 모두 말라비틀어지게 만든다. 제 수족을 숙청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2700만에 이르는 동포의 활력까지 숙살하고, 숙청하니 이 점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 어둡고 메마른 기운은 언제 이 땅에서 사라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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