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7.28 14:38
구한말의 지금 광화문 광장, 당시의 육조(六曹)거리 전경이다. 조선은 고위 관료, 명문세도가 등이 권력에 따르는 의무를 지지 않는 낙후한 구조의 사회였다.

교육부 관리의 말대로 오늘날도 신분계급은 살아있다. 신분계급이 있다손 치더라도 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있다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도 대한민국에도 그런 건 없다. 선비의 고고한 풍모는 자기만 깨끗했고 새로 임명된 청와대 수석에게는 그것조차 없다.

자랑스럽다고 떠받드는 조선의 역사는 우리에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나 고려는 귀족제였으니 자기 기반을 끔찍이 여겼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지역을 잃으면 끈 떨어진 연 신세라 목숨을 걸고 영토와 사람을 지켰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라도 쥐꼬리만 한 월급 받는 관료였다.

조선에서 관리란 신분상 귀족이 아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 대부분이 50~60개 명문가 출신이다. 부유한 유명 가문 출신이라 박봉임에도 청렴결백했다. 뒷배가 빵빵했기 때문이다. 고고하고 청렴한 조선의 선비는 도덕군자라거나 위대한 인격이 아니라 시골에 수만 평의 논밭을 가진 지방 토호였던 것이다.

“짐이 곧 국가”라고 자처하는 왕과 귀족에게는 공사(公私)의 구분이 없다. 모든 일이 공적인 업무다. 자기 일에 무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로 벼슬자리에 나가 출퇴근하는 공무원에게 공사는 확실했고, 관할이나 책임 한계 또한 명확했다. 왕이나 귀족과 달리 공무원은 직급의 범위에 따라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한다.

조선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실상은 귀족이지만 겉으론 박봉의 공무원이다. 연고지에서는 무한 책임을 져야 할 토호지만 서울에서는 출퇴근하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이라 책임이나 권한도 명확하다. 서울서야 학처럼 고고한 척하지만 터전인 지방에서는 대감님의 관직 높이에 따라 세도가 달라지니 당파 싸움에만 목을 맸다.

형편이 이러니 난(亂)이 닥쳐 양반 관료를 찾아가면 공무원 명함 내놓고 오리발을 내민다. 청사로 찾아가면 6층의 방재과에 들러 정식으로 서류 접수하고 3층의 도시계획과에 승인을 받으라 한다. 물론 가보면 딴 양반이 딴 소리에 딴 서류를 요구한다. 서류 준비해 다시 찾으면 내 분야 내 관할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한다.

오늘날이나 다를 바 없이 관료 양반들은 얌생이처럼 단물만 쏙쏙 빼먹고 정작 책임질 일에는 선을 그었던 것이다. 조선의 관료세계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나올 수 없었던 이유도 그들이 주인이 아닌 공무원이라서였다. 지방 가면 서울 대감 타령, 서울 가면 공무원 신분 타령이었다는 것이다. 유럽과 달리 조선에서는 전적으로 책임지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고귀(노블)하지 않다면 의무(오블리주)를 지울 일도 없다. 반대로 의무가 없으면 고귀한 자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의무도 책임도 없었던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절대 고귀한 자가 아니었다. 조선의 대부분 국난에서 왕과 관료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무능한 관병은 내내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백성들로 조직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앞장에 서서 싸웠다. 전직 관료와 선비들이 일본에게 나라 팔아먹고 일본이 준 은사금 받아 챙기느라 남대문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동안 상공인들은 기업을 일으켜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조선시대 신분체계다. 조선이 만들었기에 조선을 마감하며 없애야 했지만 아직도 유교적인 모럴과 계급의식이 살아있다. 그래서 상공인을 고귀하다고 하지 않는다.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고귀한 의무도 바랄 수 없다. 우리네 부자들이 외국의 부호들과 달리 고귀하게 행동하지도 않고, 고귀한 의무를 지지도 않는다 해도 탓할 것 없다. 실컷 천시해놓고는 궁할 때 손 벌리면 기꺼워 할 사람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정치나 공무원은 아직도 이 짓거리 계속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환란에 앞서서 우리를 지켜줄 왕이 없었고 귀족도 없었다. 왕이라도 천한 짓만 골라하면 천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천하게 굴어도 고귀한 의무 행하며 고귀해지는 의인들은 나타났다. 고귀한 사람이 고귀한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행위가 고귀한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옥스퍼드 대학 윈체스터 칼리지의 교훈(校訓)도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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