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석기자
  • 입력 2016.12.30 09:00

[뉴스웍스=이상석기자] 신라말 농민봉기가 발생한 직접적인 계기는 중앙정부 재정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관리를 보내 세금을 독촉한데서 비롯됐다. 

조세납부 거부가 농민봉기로 이어져 지방관청 습격하는 등 반란군으로 변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농민반란은 상주지방의 원종과 애노, 원주지방의 양길, 죽산의 기훤, 전주의 견훤 등이 이끌었던 민란을 꼽는다.

조세문란으로 야기된 농민 봉기로 신라의 동요가 생긴 9세기 말 사회 혼란 속에서 세력을 결집한 견훤과 궁예가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지방 호족들은 농민봉기를 이용하여 무기를 갖추고 힘을 모아 지방의 세력가로 성장했다.

세금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세금제도의 운용이 문란하고 조세 징수의 형평이 붕괴되면 국가라 할지라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 사례가 바로 고려(高麗) 왕조다.

고려시대 무신집권과 조세 수탈로 인한 농민봉기에 따른 국력 쇠퇴가 멸망으로 이어졌다. 왕건(王建)이 918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세운 고려 왕조는 400여년간 한반도 주인으로 자리잡았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이끄는 혁명세력인 조선에 1392년 내주고 말았다.

고려멸망의 직접 원인은 조세제도 부패

농업사회였던 고려시대 후기 백성들은 농사지어 거둔 곡식(소출)을 지주와 나눠 갖고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했다. 당시 교통수단과 유통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아 중앙 정부에 직접 소출을 납부하는게 사실상 어려웠고 정부도시 소출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중앙 정부는 벼슬아치들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주어 조세인 곡식을 거둘 권리를 부여했다. 백성들은 소출을 납부함으로써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을 대신했다. 소출이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땅을 공전(公田), 벼슬아치들에게 납부하면 사전(私田)이라 불렀다.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수탈로 백성들이 굶주렸고 국민들의 원망을 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조선의 정조는 지방관에 맞먹는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강력한 조세징수 권한으로 백성들을 어렵게 했으며 백성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도탄에 빠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군역의 경우 조선 말기에 죽은 자 또는 갓 태어난 아기 등에게 군포를 징세(徵稅)했고 가족이 세금을 피해 도망가면 친인척에게 부과하거나 마을사람들이 부담해 세금을 내게 하는 등 '세금수탈(稅收奪)'이 난무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로 야기된 동학농민혁명. <자료=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 발단은 '세금 수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민란으로 꼽는 동학농민혁명은 백성의 혈세를 군수가 멋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옛날 동학 농민전쟁의 본질적인 이유는 과도한 농민 수탈의 원인이이라고 고종도 인정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동학농민운동은 고부민란에서 출발했다. 전라도 고부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발생한 것은 고부군수인 조병갑의 탐학 때문이었다.

조병갑은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로부터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특히 만석보를 만들어 부당하게 세금을 착복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지난 1893년 말 임기만료를 앞두고 로비를 통해 고부군수에 재임한 조병갑이 수탈을 일삼자 억눌렸던 농민감정이 폭발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퍼졌다.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발생한 진주민란은 철종 13년 1862년 3월 14일(음력 2월 14일) 시작됐다. 조선 세정의 근간이던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이 어지럽던 때였다.

토지가 많을수록 조정에서 멀수록 폐해가 심했다. 삼남(下三道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 가운데 전라·경상도에서 폐혜가 두드러졌다. 진주에 부패 관료(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탐학은 극치에 달했다.

세무장부 조작과 세입 전용 등은 일상이고 무기를 사들일 예산으로 쌀을 매점해 춘궁기 농민들에게 강제 대출한 뒤 가을에 고리를 붙여 거둬 들였다. 밭을 일구거나 광산을 채굴한 이에게 상은 커녕 벌금을 매겼다.

진주민란의 결정적인 발단은 유용한 공금의 장부상 부족액을 세금으로 추가 징수하는 도결청산이다. 무려 5만2000여 석에 달하는 도결을 분납하려면 진주 일대 농가 대다수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하급 관료들의 부패, 지역 대소 토호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조선 말기 진주민란이나 동학농민혁명 등의 발생에는 조세 수탈에 따른 백성들의 불만이 직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10여년뒤 마침내 조선의 몰락으로 이어지면서 일제감정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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