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상석기자
  • 입력 2017.01.03 09:00

[뉴스웍스=이상석기자] 중국 왕조가 망하기 전에 항상 민란이 발생했다. 진은 진승, 오광의 난, 후한은 황건적, 당은 황소의 난, 원은 홍건적의 난, 명은 이자성의 난, 청은 태평천국의 난이 대표적인 사례다.

민란의 원인은 대부분 '가혹한 조세'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왕조가 무너졌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242~284년) 손호는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나 임기 말 가혹한 조세징수에 시달린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진(晉)나라에 흡수됐다.

왕조가 처음 열리면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면서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왕조가 개창한 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논공행상을 통해 거대 토지를 소유한 집단과 지배계층들이 등장했다.

왕조 중엽에 각지 세력가, 관리들이 “땅과 관직만 가지고 사느냐 우리에게도 비단과 금은보화가 필요하다” 라며 일반 백성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경작해서 먹고살 땅도 부족한 판국에 관리들의 약탈에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중국 왕조말에 각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는 10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한다. 만력제 곁에서 정부를 보좌한 신하 가운데 장거정은 국정 운영을 효율화 하고 군대의 힘을 키우기 위해 국가 재정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국가재정 늘리는 징세제도를 시행하면서 명이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장거정은 전국 토지를 측량한 다음 여러 세역을 하나로 통일시켜 은납으로 징수케 하는 세법인 일조편법을 추진했다.

전국을 1100개로 나눈 행정단위에 각각 다른 금액의 세금을 할당해 총액을 완납하도록 일선 관리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장거정이 사망하고 성년이 된 만력제가 직접 정치를 펴자 주색을 탐하는 일과 궁궐의 정원을 구축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에만 힘을 썼다.

공사비를 충당해야 했던 만력제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기 위해 환관들을 ‘흠차태감’으로 임명한 후 사방으로 보내 백성들을 착취하게 했다.

광감, 세감, 염감, 주감 등 다양한 명칭의 환관들은 백성들에게 명목도 없는 세금을 마구잡이로 강탈했다. 영세한 상인과 수공업자들로부터 상세를 걷고 은화를 약탈하기 위해 민가를 침략한데다 반항하는 백성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급기야 가중한 세금으로 기근에 시달리게 된 백성들은 잇달아 반란을 일으킨다. 호북(湖北)지역에 파견됐던 환관인 진봉 패거리의 폭력에 백성들이 일어나 진봉의 부하 16명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운남(雲南)지역에서는 백성들이 환관의 숙소를 습격하고 200여명의 패거리를 살해하는 일도 벌어졌다.

만력제가 즉위하고부터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세력을 계속 확장하면서 마침내 중국을 침범했다. 세금에 반발하며 일어난 농민 이자성의 세력이 커져 북경을 점령하자 당시 숭정제(崇禎帝)의 자결로 명나라는 17대 277년 만에 멸망에 이른다.

혈세와 강제노동으로 축조한 만리장성이 진나라의 멸망을 불렀다.<사진출처=바이두>

◆백성의 피눈물 녹아든 흑사(黑史)... 만리장성 축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 만리장성을 꼽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축조물 가운데 하나다. 장성의 규모와 축조 기간 등 만리장성은 과학 기술적 측면에서 상당 부분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면이 많아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린다.

위대한 군사 건축물인 만리장성은 현재 관광자원으로 중국의 대표 랜드마크이지만 이면에는 가혹한 세금을 부담했던 백성들이 피눈물이 녹아든 흑사(黑史)가 숨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 축조 초기에 무려 30만 명의 대규모 인원을 동원했다. 인류 건축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의 숫자였다. 많은 인원과 더불어 엄청난 세금 징수도 역사적 사실로 기록이 남았다.

만리장성은 하루 3교대로 연인원 1억 3500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백성들이 동원됐다.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거둔 세금과 부역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지면서 진나라 멸망 원인으로 작용했다.

황제, 사랑의 선물 '타지마할'...결국 무굴제국은 망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알려진 인도의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제 5대 황제 샤 자한의 명령으로 건립했다.

황후에 대한 황제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유명 하지만 타지마할을 지을 때 황제는 백성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똑같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설에 동원된 장인들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무리하게 추진한 타지마할 공사로 국력소진과 백성들 저항으로 무굴제국은 역사속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인도 무굴제국 5대 황제가 죽은 황후를 기리기위해 1632년 착공한 타지마할. 22년만에 완공됐으나 이후 무굴제국의 국고는 바닥났고 얼마 못가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사진=김경우 작가>

1350년대 일본에서는 농민들이 세금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간 일이 발생했다. 후쿠이현의 영주가 남북조전쟁에 필요한 군비 조달을 위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인력을 동원했다.

농민들은 영주에게 호소문을 올렸지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농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지방자치 단체가 시민의 세금을 잘못 활용함에 따라 재정파탄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던 보기드문 사례도 남았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유바리(夕張)시는 2006년 재정 파탄으로 지방자치 단체중 최초로 파산을 선언했다.

유바리(夕張)시 재정파탄의 근본 원인은 무리하게 추진한 관광진흥산업이다. '석탄에서 관광으로'란 구호 아래 관광진흥사업을 지역경제활성화 전략사업으로 선택하여 공기업과 주식회사 형태의 제3섹터를 설립 운영하면서 적자가 발생하면 투자비율에 따라 시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체 예산의 56.2%가 무리한 시설투자로 이어졌다.

유바리시는 석탄의 역사 촌(村)을 비롯 놀이시설, 스키장, 온천, 호텔, 골프장 등 건설했지만 경기둔화와 관광객 감소로 적자경영에 빠져 지방재정이 파탄을 맞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주민혈세를 철저한 준비없이 무리하게 집행해서 실패한 대표적 사례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