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재필기자
  • 입력 2017.01.10 09:00
 

[뉴스웍스=최재필기자] '헌법 위에 예산 있다.' 

매년 말 예산안 처리를 위한 국회가 열리면 여의도 정가에서 유행처럼 떠도는 말이다. 국회의 헌법 경시 풍토를 빗댄 표현이다. 국회는 정부가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확정 짓는 권리와 의무를 헌법으로부터 부여받는다. 하지만 국민이 목격하는 국회의 예산안 처리과정은 '졸속' 그 자체다.

법정 시한을 넘기는 것은 당연시되고, 예산안 심의와 처리과정에서 '사익(私益)'이 '공익(共益)'을 대체했다는 지적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법정시한을 넘겨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예산 심의 기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단서 조항'을 이용한 민원 해결용 '쪽지'가 등장했다. 증액된 새해 예산 대부분은 여야 '실세'를 중심으로 한 총·대선용 지역구 몰아주기 예산이었다. '담합'과 '협잡'이 판을 친 셈이다.

◆예산안 처리, 정치논리가 경제논리 앞서

예산안 처리 과정의 문제점은 경제논리보다 정치적 셈법이 앞선다는 데 있다. 예산안과는 하등 상관없는 여야의 법안 주고받기 속에 정치논리가 민의의 전당을 지배했다. 영·호남 예산 주고받기는 두 지역을 양분하는 거대 양당에 의한 독과점 카르텔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줬다.

특히,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예결위)는 '정치적' 예산처리의 핵심으로 지적된다. 예결위 위원 중 막판 예산 삭감 및 증액을 결정하는 예산안조정소위원회 위원은 그야말로 예산 편성의 '슈퍼 갑'으로 통한다. 부처는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 원안을 최대한 지켜내기 위한 전략으로 소위 위원들에게 지역 예산을 '선물'하기도 한다. 한 명의 조정소위 위원이 따낼 수 있는 예산이 100억 원대라는 소문도 있다. 당 대표,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핵심 당직자들과 실세로 불리는 중진 의원들도 비슷한 규모의 지역 예산을 챙길 수 있다고 한다.

예산안 심의가 막바지에 이르면 지역 예산을 챙기려는 의원들의 민원성 '쪽지'가 예결위원장에게 쏟아진다. 쪽지를 통해 예산 챙기기에 성공한 의원 중에는 '지역 이기주의'라는 언론의 질타를 '무용담'이라고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에서는 그해의 의정활동을 칭찬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자성 차원에서 쪽지예산을 차단할 수 있는 국회법 개정안들이 발의된 바 있지만, 이들 모두 관련 상임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선책으로 소수 독재와 법안 연계를 부르는 국회선진화법의 개정, 예산 심의를 충실히 하기 위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일반상임위화 등을 꼽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회와 정치판이 쇄신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예산 심사를 잘하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한 의원이 지역에서 올라온 민원성 '쪽지' 예산을 검토하고 있다.

◆ "12월 한 달은 행정 마비 기간"…전문가 "정치판, 근본적 쇄신 필요"

국회의 '정치적 셈법'에 의한 예산안 처리는 행정기능 마비도 초래한다. 관가에서는 '12월 한 달은 행정 마비 기간'이라고 한다.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해 사무관급 이상 대부분 관료들은 내년도 예산안의 국회 심의를 위해 여의도로 출퇴근해, 현안을 처리할 사람이 없어서다.

또한 예산안이 처리되지 못한 기간 정부는 내년도 가예산을 만들고 추가 예산을 만드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이 일상이 돼 버렸다.

지방자치단체는 더하다. 지방 정부와 지방 의회는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넋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정부 예산이 확정돼야 정부에서 예산을 배분받아 지자체 예산을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고질적인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국회선진화법 개정, 국회 기능 정상화, 투표를 통한 응징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형준 교수는 "지도부가 법안 주고받기, 예산안 나눠 먹기 협상을 하는 지금 같은 상황이면 국회의원 300명이 필요 없고 10명만 있어도 된다"며 "국회 기능, 상임위 입법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법 하나하나가 다 민생과 직결돼 있고 국가 미래와 관련돼 있는데 예산만 통과시키면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졸속 입법을 하게 되면 국회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이라며 "국회선진화법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국회의 본질적 기능이 예산 심의, 입법 기능인데 국회의원들이 본질적 부분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진영 논리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자기 지역구 예산 확보해서 재선되는 데 매몰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인지 전문가들은 국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근복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 교수는 "제도를 갖고 개선하는 수준은 넘어섰다"며 "이제는 국민이 응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잘못된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고 의원들이 자율성과 소신을 갖고 일하도록 공천 제도를 바꾸고, 국민의 묻지마 투표 관행도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기본적으로 국회 기능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며 "의원들이 국민 혈세를 어떻게 쓰는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산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국회의 철저한 예산심사가 필수다. 예산심의라는 권한을 헌법으로부터 부여받은 국회는 '사익'이 '공익'을 대체하는 구태의 모습에 대한 국민적 비판을 되새겨야 한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