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8.22 14:58
폭력과 부조리 등에 둔감해져 가는 사회 모습을 그렸던 2004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인플루엔자'의 스틸컷 장면이다. 역병은 짧은 시간에 매우 넓게 퍼지는 질명을 일컫는다.

한 때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이 위세를 떨쳤다. 모두 다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 일종의 전염병이자 돌림병이었다. 누구로부터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병 말이다. 당시에는 사망 환자의 사례까지 발생하면서 우리의 경각심이 매우 높아지기도 했다.

이런 병은 한자 낱말로 흔히들 역병(疫病)이라거나, 역질(疫疾), 여역(癘疫), 염역(染疫) 등으로 적는다. 온역(瘟疫), 염병(染病)도 마찬가지 뜻이다. 모두 균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는 병이다.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전해지는 그런 병에 일반적으로 붙는 대표적인 한자가 바로 疫(역)이다.

이 글자는 ‘병이 들어 무엇인가에 기대다’는 의미의 疒(녁)이라는 부수에 ‘막대기’ ‘몽둥이’라는 새김을 지닌 殳(수)의 결합이다. 문제는 뒤의 殳(수)라는 글자다. 지금은 통용하지 않는 글자지만, 초기 한자 형태에서 드러내는 모습은 전쟁 때나 사용하는 무기에 가깝다. 따라서 殳(수)는 초기 한자 마당에서 ‘무기로 사람을 찔러 상하게 하다’의 뜻으로 나온다.

사람을 상하게 하는 그런 무기 또는 행위가 ‘질병’을 의미하는 부수 疒(녁)과 붙어 疫(역)이라는 글자를 이룸으로써 ‘사람을 괴롭히는 병’이라는 의미를 얻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중에 이르면 이 글자는 “사람이 함께 앓는 병” “이리저리 옮는 병” 등의 의미를 더 추가한다.

글자는 전염성 강한 병증에 많이 따라다닌다. 어린 시절 앓는 홍역(紅疫)이 눈에 띄고, 한 번 앓아 그 병을 피하는 대응력이 생긴 경우를 적는 면역(免疫)도 보인다. 둥근 발굽을 지닌 동물의 돌림병을 구제역(口蹄疫)이라고 적고, 일반 짐승끼리 전해지는 병을 수역(獸疫)으로 적는 식이다.

순우리말로는 ‘마마’로도 불리며 과거 왕조 시절 숱한 어린이의 생명을 위협했던 천연두(天然痘)는 다른 말로 호역(戶疫)으로도 적는다. 봄철에 도는 유행병은 온역(溫疫), 가을에 닥치는 그런 병은 한역(寒疫)이라고 적는다. 말에게 도는 병은 마역(馬疫), 소의 경우라면 우역(牛疫)이다. 닭 돌림병은 계역(鷄疫)이니, 요즘 말로 하면 조류 인플루엔자의 일종일 테다.

이런 돌림병은 재난(災難)과 다를 게 없다.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막기도 한다. 그래서 疫災(역재)라는 조어도 가능하다. 국가 차원의 재난이다. 따라서 그를 사전에 예방하고, 발병 이후라도 확산치 못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역병을 사전에 막는 일, 방역(防疫)은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힘을 쏟아야 할 사안이다. 욕설에나 등장하는 ‘염병’에 휘감기지 않으려면 국가 차원의 방역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역질이 돌 때마다 정부의 초기 방역 대응이 늘 부실했다. 큰 사건과 사고에 직면해 허둥지둥 하다가 재앙을 키우고 마는 게 어제 오늘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뭐라 일러야 좋을까. 정부의 운영이 부실해 키운 돌림병 말이다. 미덥지 못한 공공영역이 키운 돌림병이라서 公疫(공역)이라고 할까, 아니면 행정부의 과실이라서 行疫(행역)이랄까. 국가 전체의 수준과 기능이 낮아져 생겼다고 해서 國疫(국역)은 어떨까. 그러나 다 부질없는 조어다. 정부의 대응은 방역에 관한 한 철저하고 또 철저해야 한다.

 

<한자 풀이>

防 (막을 방): 막다, 방어하다. 맞서다, 필적하다. 헤살놓다, 훼방하다. 둑, 방죽. 요새, 관방(關防).

疫 (전염병 역): 전염병. 돌림병. 역귀.

癘 (창병 려, 창병 여, 문둥병 라, 문둥병 나): 창병(瘡病: 피부에 나는 질병). 염병. 죽이다. 담그다, (쇠를) 불리다. 문둥병(라).

瘟 (염병 온): 염병. 온역(瘟疫: 급성 전염병의 하나). 아픈 모양. 괴로워하다.

 

<중국어&성어>

疫疾 yì jí: 역질, 역병, 염병 등과 같은 뜻.

疫病 yì bìng: 위와 같다.

禽流感 qín liú gǎn: 조류(禽)에 의해 옮겨지는 독감, 조류 인플루엔자. 외국 의학용어의 현대 중국 번역어다.

鼠疫 shǔ yì: 일명 흑사병(黑死病). 유럽을 한 때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중국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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