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05 16:37

(3) 후퇴도 작전이다-1

[뉴스웍스=유광종기자] >이 연재의 모두에 중공군에게 크게 예봉이 꺾여 무너졌던 1950년 10월 말과 11월 말의 상황을 적었다. 최근까지 실은 유엔군과 우리 국군의 북진 뒤에 빚어진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 뒤로는 아주 길고 험난한 후퇴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군의 후퇴는 그 또한 엄연한 작전이었다. 후퇴의 상황이 어쩌면 군 지휘관의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했던 국군 1사단 또한 성난 물결에 밀린 물체처럼 후퇴를 거듭했다. 외곽의 길로 평양을 돌아 황해도를 지나 임진강까지 밀렸다.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흩어진 아군 병력을 모아 후방으로 내려 보내면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러나 12월 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의정부 인근에서 급서했다. 워커 사령관의 뒤를 이어 한국 전선에 부임한 사람이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 무렵 사단 본부 요원들과 누군가의 연설을 듣는 백선엽 1사단장의 모습(왼쪽 끝)이 어딘가 초조감에 싸여 있는 듯 보인다.

 

> 한국군 1사단을 방문한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모습이 가운데에 보인다. 그 옆으로 선글라스를 착용한 이가 한국군 1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8군 예하 1군단의 사령관 프랭크 밀번 중장이다. 이 무렵의 전황은 아군에게 암담했다.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밀렸고, 뒤이어 벌어진 3차 공세에서 급격히 뒤로 밀리던 시점이다. 그러나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적에게 땅을 내주는 일에 민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적의 전투역량을 거대한 공격력으로 소멸시킬 방도에 주목하고 있었다.  

 

후퇴의 상황이 암담한 심정을 던지는 것은 맞다. 그러나 후퇴는 매우 중요한 작전의 일환이다. 적의 공세로부터 최대한 자신을 다치지 않게 여러 면으로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병력을 건사하면 기회는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후퇴 길에 오른 한국군 1사단이 어느 지점의 벌판에 도열했다. 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훈시를 듣기 위해서다. 다행히 1사단의 병력은 적의 공세로부터 크게 무너지지 않았다. 따라서 병력이 온전했고, 지니고 다니던 화력(火力)이 건재했다. 일사불란하게 후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3차 공세에 나선 중공군은 매우 강했다. 임진강까지 1사단은 밀리고 또 밀렸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