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07 14:46
우뚝 솟은 송전탑은 현대 문명의 한 상징이기도 하지만 주변 경관을 해쳐 큰 문제다. 집중적으로 들어선 송전탑이 기이하다 싶을 정도다. 이런 경우가 살풍경이다.

스산하면서 어딘가 숨을 꽉 막히게 하는 모습을 일컬을 때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단어를 쓴다. 좋은 경치 죽인다는 엮음이다. 사전적인 뜻에 따르면, 좋고 훌륭한 경치를 망가뜨리는 어떤 모습이다. 이런 살풍경이 빚어지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다 많다.

소설가 심훈은 작품 ‘영원의 미소’에서 “여러 해를 두고 갉아 먹은 산과 언덕이 살풍경을 면하기는 앞으로…”라고 썼다. 메마르고 볼품없는 풍경을 말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광기가 어린 살풍경은 귀신이라도 잡을 듯했다”(이기영ㆍ고향)는 표현도 나온다. 살기까지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뜻이다.

문을 열어 놓고 달리는 자동차, 향긋한 차 한 잔 앞에 내놓는 폭탄주, 음악 연주회에서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 힘겹게 선 버스의 노인 앞에 다리 꼬고 앉은 젊은이, 경치 좋은 곳에 들어선 채석장….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이런 모습이 바로 살풍경이지 싶다.

중국에서는 당(唐)대의 유미파(唯美派)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본격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잡찬(雜纂)>이라는 책에서 여섯 가지의 살풍경을 들었다. 시공은 다르지만 나름 제법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선 ‘흐르는 맑은 물에 발 씻기’다. 청류(淸流)의 맑고 깨끗한 풍취가 오탁(汚濁)의 발 씻기 앞에 무너지고 있다. 다음은 ‘화사한 꽃 위에 바지 올려놓고 말리기’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에 일상의 범속함이 끼어들어 정취가 망가지고 있다. ‘가파른 산에 집짓기’는 산의 좋은 경치가 사람의 욕망 앞에 무너지는 경우다.

‘거문고 태워 학 삶아 먹기’도 있다. 焚琴煮鶴(분금자학)으로 적는 상황이다. 거문고와 학은 인문(人文)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동물이다. 지식사회의 전통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런 거문고를 태워 장작으로 삼고, 그 위에 죽인 학을 냄비에 담아 삶는 행위다. 사람이 지닌 고급스런 정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꽃 앞에서 차 훌쩍거리며 마시기’, ‘고요한 숲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가 그 다음을 잇는다. 꽃이 지니는 아름다움이 먹고 마시는 일 때문에 흩어지고, 세속을 벗어난 고요함이 저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 의해 무너지니 살풍경으로 꼽기에는 그럴 듯하다.

‘살풍경’은 煞風景으로도 적는다. 마찬가지 뜻이다. 앞의 첫 글자는 모두 죽이다, 없애다 등의 의미를 지녔다. 위의 여럿 가운데 주목하고 싶은 살풍경은 ‘거문고 태워 학 삶아 먹기’다. 자고로 거문고와 학은 문사들이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의탁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분금자학’은 그런 인문의 정신을 말살하는 경우다. 이 말은 간혹 문사의 정신이 현세의 답답한 상황에 막혀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선비 스스로 취하는 극단의 행위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문인과 문사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거문고를 태워 학을 삶는다면 어떨까. 요즘 판사가 금전을 수수한 뒤 재판에 간여해 붙잡혔고, 검사가 친구의 돈을 받는 일이 생겨 화제다. 어제 오늘의 일일까. 오랜 관행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의 중추, 곧은 저울로서 작용해야 할 법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배어나온다. 이제 우리는 그런 살풍경을 적어 경계해야 할 때인지 모른다. 테이블 밑으로 돈을 세는 법정의 판사, 룸살롱에 스폰서와 앉은 검사, 국민 앞에 고개 떨어뜨리는 대법원장…. 거문고 태워 학을 삶아 스스로 훼절(毁節)함으로써 빚어지는 우리 지식사회의 이런 살풍경 행렬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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