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23 14:57
1910년 무렵 일본이 촬영한 조선 태종 헌릉의 모습이다. 陵(릉)이라는 글자는 보통 군왕 등의 분묘를 일컫는다. '천천히' '완만하게'라는 새김이 원래 이 글자가 지닌 뜻의 하나였다.

선릉역의 다음 글자가 陵(릉)이다. 이는 왕릉王陵, 즉 조선과 고려, 나아가 신라시대 모든 왕과 왕후 등을 안장한 묘다. 그 정도의 뜻으로 매우 잘 알려진 한자다. 원래의 새김은 흙이 커다랗게 쌓여 있는 곳을 가리킨다. 큰 산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웅장하게 쌓인 흙이나, 원래 그렇게 높이 쌓인 흙무더기 정도의 뜻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구릉丘陵이다. 큰 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산의 모양을 닮은 언덕 정도의 지형이다. 그렇게 생긴 지형에 대개 이 글자가 붙는다. 나중에 높게 쌓은 군왕의 무덤을 부를 때 자연스레 이 글자가 따라 붙었다.

옛 시절의 군왕은 살아생전에, 그리고 죽어서도 호사豪奢를 누렸다. 그러니 거대한 봉분을 갖춘 묘역이 만들어지고, 튼튼한 관곽棺槨 안에 몸을 누인다. 각종 석물石物은 물론, 풍부한 부장품까지 지니고 저승을 간다. 이승 아닌 저승에서도 그런 복락을 누릴 리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옛 군왕의 무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치밀한 관리가 따라 붙었다. 능관陵官이라는 군왕 무덤 관리를 하는 관직官職이 있었고, 때로는 능령陵令 또는 능참봉陵參奉이라고 해서 죽은 임금의 능역陵域을 돌보는 변변찮은 벼슬도 생겼다. 능역陵役은 능을 만들거나 고칠 때 벌어지는 역사役事다. 주변의 일반 백성들이 그 일을 위해 무수하게 동원됐을 테다.

능소陵所는 임금 묘역, 즉 능이 있는 곳이다. 능침陵寢은 임금이 죽은 몸으로 누워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능답陵畓은 그 능에 딸려 있는 논과 밭, 즉 전답田畓을 일컫는다. 능속陵屬은 능의 관리와 유지 등에 필요한 제반 인원 등을 가리킨다. 신분이 낮은 상민이나 노비 등이 그 안에 들었을 것이다.

중국은 황제皇帝의 틀을 이루다 보니 규모가 매우 크다. 초기 왕조인 한漢나라 때는 아예 죽은 황제가 묻힌 능을 중심으로 도시까지 생겼다. 능읍陵邑까지 생겨났다는 얘기다. 조그만 읍이 아니라 실제는 매우 큰 도시라고 봐야 한다. 특히 한나라 초기 황제들은 자신들이 묻힌 능역을 중심으로 인근에 매우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특히 한나라 건업 군주인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비롯해 다섯 황제의 능역을 중심으로 인근과 먼 곳의 여러 부자들과 귀족, 고관 등을 이주시켜 거대한 ‘타운’을 형성했다. 이른바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오릉五陵’이다. 그래서 생긴 성어가 ‘五陵少年(오릉소년)’이다.

돈 많은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고관, 명망이 있는 귀족들이 모여 있던 곳이니 오죽 번창했을까. 그곳의 돈 많고 부모 잘 둔 집안 자제들이 바로 ‘五陵少年(오릉소년)’이다. 돈 많고 권세 높으니 이들이 발산하는 기행奇行으로 그곳은 자주 소란스러웠을 법하다. 紈絝子弟(환고자제)라고 우리가 쓰는 ‘돈 많은 집 아이들’의 뜻이 이와 같다. 가는 비단(紈) 바지(絝) 차림의 자제(子弟)라는 엮음이다. 어쨌거나 ‘五陵少年(오릉소년)’은 하릴 없이 빈둥거리면서 엉뚱한 곳에 돈을 펑펑 써대는 잘 나가는 집안의 문제아를 가리키는 성어다.

구릉의 모양은 부드럽다. 산처럼 뾰족하게 솟아있지 않다. 그래서 陵(릉)의 새김에는 ‘천천히’라는 뜻도 들어있다. 그와 관련이 있는 무시무시한 혹형酷刑이 바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이다. 여기서 한자 陵(릉)은 凌(릉)으로도 쓴다. 과거 조선에서도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능지처참하라”고 소리쳤다는 내용이 TV 드라마에 가끔 등장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형벌은 조선에서 실행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머리를 비롯해 팔과 다리 등의 사지四肢를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매달아 찢는 형벌은 거열車裂이라고 한다. 이를 간혹 ‘능지처참’이라고 부른다지만, 사실 다른 형벌이다. 사람의 몸을 조금씩 잘라내는 형벌이 능지처참인데, 죄수를 두고 흉부에서 사지, 나아가 여러 군데를 조각조각 도려내는 방법이다.

물론, 전제가 하나 있다. 형의 집행 과정에서 죄수의 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정해진 횟수를 채우지 못하고 죄수가 먼저 죽으면 집행하는 관원, 즉 우리식의 ‘망나니’에게 형벌이 가해진다. 사람을 살려 둔 채 그 몸을 조각조각 도려내는 형벌에 그 陵(릉)이라는 글자와, ‘천천히’의 새김인 遲(지)라는 글자가 들어있다. 조선은 실행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나마 조금이라도 인정을 따지는 왕조였다고 할까.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그 형벌이 이뤄져 마지막 왕조인 청淸나라 말엽인 1910년 이후에야 겨우 없어졌다고 한다. 황제皇帝의 권력이 늘 시퍼렇게 살아 숨 쉬던 중국의 환경이 정치적으로는 그 만큼 가혹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왕조 시대가 남긴 그림자는 그렇게 짙고 어둡다. 사람 살아온 궤적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런 가혹함으로 인해 생긴 문화적 유산은 잘 보호하고 아껴야 할 일이다. 선릉과 정릉 또한 우리가 지키고 아껴야 할 문화재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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