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04 18:21
방편, 임시변통, 임의의 계책, 권변의 꾀 등을 다루는 영역이 권도(權道)다. 명분과 원칙, 도리 등과는 대조적인 단어다. 그 내용을 다룬 중국 책자의 표지다.

이것도 도(道)라면 도인지 모른다. 그 ‘도’라는 것은 진리의 요체, 궁극적으로 가야 마땅한 길을 가리키는 글자다. 따라서 왠지 이 권(權)이라는 글자 앞에는 좀체 갖다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권도(權道)’라는 말은 가끔 쓰인다.

여기서 權(권)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힘’이 아니다. 조금 설명이 필요한 글자다. 흔히들 권의(權宜)라는 말을 사용한다. 방편을 좇아 임의대로 움직인다는 뜻의 단어다. 권변(權變)이라는 말도 있다. 일의 형편에 따라 유리한 방향을 취하는 행동이나, 그런 상황이다.

맹자(孟子)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형수를 건져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남녀의 접촉 등을 엄격히 제한했던 유가의 습속에서 여자인 형수의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데, 물에 빠져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의였다.

맹자는 당연히 “우선 건지고 봐야 한다”고 답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에서는 남녀가 서로 신체접촉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만 따를 수 없다는 얘기다. 지금에야 지극히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꼭 그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녀 사이의 엄격함을 유지하는 일은 원칙, 도리, 명분이다. 그에 비해 우선 사람 살리고 봐야 하는 일이 방편이자 권의(權宜), 권변(權變)의 사고다.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 해도 무방하고, 변통(變通)이라고 해도 좋다. 원칙과 도리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런 권의, 권변, 임기응변의 사고도 필요하다.

그러나 원칙과 도리, 명분이 무너지거나 아예 없는 상태에서 권의와 권변이 판을 칠 때가 문제다. 지향하는 바가 옳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 번지는 권의와 권변의 사고는 그저 잔꾀이며, 게다가 흑심마저 품는다면 그 정도가 퍽 나빠져 사기(詐欺)와 편술(騙術)로 흐르기 쉽다.

동양에서 원칙과 도리, 명분을 말하는 글자로는 經(경)과 常(상)이 있다. 종교의 핵심 책자를 경전(經典), 기독교의 그 것을 성경(聖經), 부처의 말씀을 불경(佛經)이라고 하듯이 經(경)은 사람이 따르고 받들어야 할 원칙과 명분에 해당한다. 常(상) 또한 변치 않는 원칙, 가르침을 이르는 글자다. 윤리의 핵심 줄기를 윤상(倫常)이라고 할 때가 그렇다.

이런 원칙과 도리, 명분이 옳게 서 있는 상태에서 권의와 권변이 등장하면 봐 줄만하다. 큰 방향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기괴한 변수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여러 난관을 이겨갈 때 가끔 변통과 우회가 필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큰 원칙과 도리 등을 잃으면 이 경우의 변통과 우회는 잔꾀와 속임수, 권모와 술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제 잇속만을 따지는 사람들의 음모와 계략이 횡행해 사회의 전체 분위기는 엉망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아마 우리가 그 흐름에 이미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정치판이 권모와 술수, 얕고 낮으며 자디 잔 꾀로 서로를 골탕 먹이는 일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행정의 감시에 입법의 권력을 쥐어 날로 막강해지는 국회가 원칙과 명분을 잃고 잔꾀와 권모의 음습한 그늘에서 헤맨 지는 꽤 오래다.

이제 우리 기업들도 그런 길을 가려는가 보다. 횡령과 부정, 분식(粉飾) 등으로 투자자와 국민들을 현혹하는 기업인들이 속출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좋은 소식은 먼저, 나쁜 소식은 나중에 알리면서 순진한 투자자들을 울린 유명 제약회사도 등장했다.

우리사회가 드러내는 도덕, 원칙, 도리의 무너짐이 급격하다. 사회 성원 모두가 그런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이제는 깊어진다. 갈 길은 아주 먼데 벌써 해가 진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탄식이 배어나오면서 우리 갈 길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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