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05 15:19
산둥(山東)에 있는 강태공(姜太公) 기념관의 모습이다. 전직 노태우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성씨(姓氏)의 뿌리를 언급하면서 중국인들에게 화제로 떠올랐던 곳이다. <사진=건국대 한인희 교수>

이 산둥은 어쩐지 우리와 매우 친숙하다. 6공 정부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중국에서 매우 좋은 대접을 받는 한국 정치인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딛고 냉전의 대립적 구도를 넘어서 ‘죽의 장막’을 헤치고 나온 중국과 국교를 텄으니, 친구 사이의 의리를 세심하게 따지는 중국의 입장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말 좋은 친구’, 즉 ‘라오펑여우(老朋友)’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퇴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 현직의 국가원수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 그런 중국의 극진한 대접에 마음을 놓았던 것일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뒤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가지 미묘한 행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내 언론보다 중국 언론에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연원은 이렇다. 노 대통령 재임 중 한국에 온 산둥의 책임자가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대통령은 그에게 “산둥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발언했다. 그런 발언을 듣고 산둥성의 책임자는 귀국 뒤 바로 부하 직원들을 동원해 산둥의 노씨(盧氏)에 관한 자료를 모두 찾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노씨(盧氏)’는 ‘강씨(姜氏)’에서 떨어져나간 갈래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두 성씨의 뿌리는 같다는 얘기다. 중국의 강씨 중에서 ‘강태공(姜太公)’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강상(姜尙)은 그 뿌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그런 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에 맞춰 중국 산둥 관리는 모든 힘을 동원해 노 전 대통령의 뿌리 찾기에 나섰던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2000년 6월 중국을 방문하고, 급기야 “내 조상의 뿌리”라고 했던 산둥성을 찾아간다. 중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날 산둥성 창칭(長淸)현을 찾은 노 전대통령 내외는 노씨의 시조(始祖)라고 알려진 강태공, 즉 강상의 유적을 참배하고, 산둥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중국 노씨의 사당에도 들려 예를 올렸다고 한다.

아울러 그곳에서 마침 열리고 있던 전 세계 노씨 종친회 연구모임에 들러 격려사와 함께 소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 연설 내용은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이 관련 소식은 중국의 검색 포털을 두드리면 아주 풍부하게 내용이 뜬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재미도 있으면서 묘한 상상력까지 자극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는 엄연히 다른 국체를 형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직 국가원수가 중국 땅에 발을 딛고서 “내 뿌리가 여기 있다”라고 하니, 동아시아의 정치적이며 문화적 맹주(盟主)임을 내세우는 중국인들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중국은 늘 그랬다. 중화(中華)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으니, 인접한 국가들을 ‘주변’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중국에 파견을 나가 그곳에 주재하고 있다 보면 이런 일은 제법 많이 일어난다. 한 때 청와대의 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사람이 중국의 같은 성씨 종친회에 나타나 “몇 백 년 만에 조상의 고향을 찾아와 기쁘다”면서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일부 대기업 총수의 일가친척은 배를 통째로 빌려 중국 남부의 ‘조상 마을’을 단체 방문하는 장면도 연출한다.

그에 관한 시비는 자세히 논하지 않겠다. 단지 우리가 한자(漢字)를 차용하고, 나중에는 성씨까지 차용했다는 점만은 기억하자. 진짜 그곳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예도 있겠으나, 한반도를 구성하는 주민들은 혈연이 직접 중국과 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반도가 한자를 본격적으로 차용하는 시기는 고려 초다. 그 때 행정적 필요에 의해 아주 많은 한자 성씨를 한반도 사람들이 차용했고, 왕실은 부지런히 수많은 사람에게 성씨를 내려 주는 사성(賜姓)을 실시했다. 그런 점을 안다면, 우리가 쓰는 성씨와 중국의 성씨가 글자만 같다고 해서 바로 같은 혈연이라고 여기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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