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1.10 16:43

집에 난 창을 통해 우리는 바깥을 살핀다. 그러나 각자 향하고 있는 방위에 따라 창문은 느낌을 달리 한다. 동녘의 창에서 사람은 여명(黎明)의 아스라함을 느낀다. 북쪽의 창가는 세사(世事)로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서늘함을 준다. 햇볕 따사로운 남향의 창에서는 삶의 온기를 맛볼 수 있다. 해 질 무렵의 서쪽 창가는 찬연한 노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의 장엄함을 던진다.

창(窓)은 이래서 중요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는 사람이 복잡다기한 세상만사를 뒤로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치다. 창이 있어서 생각은 다듬어질 수 있고, 시간에 쫓기는 삶은 잠시 숨을 고른다.

동양에서의 창은 예부터 학문 수련의 장소라는 의미를 지녔다. 옛 서당에서 학동들이 연습 삼아 쓴 글들은 ‘창고(窓稿)’ 또는 ‘창과(窓課)’로 불렸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함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창우(窓友)’다. 또 이들의 우정을 ‘창의(窓誼)’라고 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10년의 힘겨운 공부에 매달릴 동안에는 찾아주는 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이 모두 알아준다(十年寒窓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는 말이다. 없는 살림에 어렵게 공부를 이어간 세월을 ‘차가운 창’이라는 뜻의 ‘한창(寒窓)’으로 적었다.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를 창문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하다. 이를 설명하는 자료는 마땅한 게 없다. 미루어 보건대 세상의 번잡함 속에서도 사람이 여유와 함께 깨끗한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창문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동양 사회의 공부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보다 사람 됨됨이를 중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같은 장소에서 배움을 함께한 사람은 그래서 동창(同窓)이라고 부른다. 학교에 다녔던 시기를 적을 때 학창(學窓)이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다. 이 같은 개념은 중국 송(宋)대에 처음 그 용례가 보이다가 요즘의 현대 한자 용어를 집중적으로 번역한 일본에 의해 쓰임새가 많아졌다. 우리에게도 퍽 친숙한 낱말들이다. 

예전에도 한 번 소개한 내용이다. 제갈량(諸葛亮)은 죽기 전 자신의 여덟 살 난 아들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글을 남긴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구절 둘이 있다. “담박함으로 뜻을 밝히고, 고요함으로 먼 곳에 이른다(淡泊以明志, 寧靜以致遠)”는 내용이다. 

배움에 뜻을 둔 이는 자못 이래야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이해관계에, 어줍지 않은  논리에, 의도를 담고 있는 시각에 흔들리다 보면 그 배움은 당당하지 않아 먼 경계에 이르지 못한다. 제갈량의 가르침은 어떻게 보면 배움의 장소를 차가운 창, 한창(寒窓)으로 적었던 흐름과 같은 맥락이다.  

국정교과서의 독단적인 역사 규정을 피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그동안 일군 성과와 성취를 인정하는 역사 인식의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그로써 장기적인 국가발전에 다음 세대가 건전하게 참여하는 길을 터야 한다. 그런 차분한 배움의 창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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