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08 08:20

최근 진행된 에니어그램 연수 중에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세요?"라는 강사님의 질문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차마 소리내어 말은 못했지만 머리에 뚜껑이 열릴 때면 꼭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 "케이크를 먹어요"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건강염려증이 심한 나는 웬만해서 케이크를 찾는 일이 없다. 사탕을 제일 싫어하고, 쓰디쓴 아메리카노만 찾고, 90퍼센트 카카오 초콜릿만 고집하는 내가 케이크를 찾아 헤매는 순간은 분명 일상적이지 않은 때가 대부분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혼자 커피전문점에 간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제일 화려한 케이크를 주문하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먹고 마신다. 뜨거운 것과 열량이 위장과 몸을 채워 답답함을 밀어낼 때까지 기다린다. 이를 통해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달랜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음식과 시간을 통해 어려운 순간을 잘 연명해 왔다는 것이다. 너무 별것 아니어서 우습지만 케이크 처방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Wayne Thiebaud <Boston Cremes> 1962

웨인 티보 Wayne Thiebaud (1920~) 의 그림은 물감을 두껍게 펴 발라올려 물감의 물성을 강조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 때문에 웨인 티보의 음식 그림은 음식 고유의 재질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리예 음식 같은 느낌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러한 임파스토 기법은 케이크 그림에만큼은 탁월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흰 물감을 잔뜩 올려 물감의 터치를 살린다. 그림이지만 크림이 잔뜩 발린 듯 나이프 자국이 선연한 케이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자주색 물감으로 쓱쓱 그어 거칠게 그은 붓질은 스며나온 잼의 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잘 섞이지 않는 검붉은 물감은 크림 가운데 푹 박힌 체리의 모습 바로 그대로다. 

웨인 티보는 1920년대에 태어나 백세에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매일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담백한 노장의 작가다. 일찍이 상업미술계에서 만화가와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학위를 얻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마침 1962년 미국에서 팝아트의 바람이 불면서 당시 달콤한 디저트를 주제로 열었던 개인전이 호응을 얻는다. 그 때에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이 바로 이 케이크 그림들이다. 사물을 직접 보고 관찰하는 방법보다는 기억 속에서의 사물의 이미지를 끌어내 오는 방법을 사용한다. 

웨인 티보의 케이크에는 물성 그 자체로 달콤함이 느껴지지만 결코 단내가 뚝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시선의 구도 때문인 것 같다. 달콤하지만 푹 빠지지 않는 절제된 느낌, 이러한 느낌 때문에 웨인 티보의 케이크 그림은 달아서 물린다는 느낌이 없다. 푹신한 느낌은 있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없다. 그래서 화면에 가득 찬 케이크가 부담스럽다는 느낌보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이 만족감이 전해져 오면 머리끝까지 올랐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사람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칼날을 감당하지 못하고 남을 상처입히거나 자신에게 상처입히고야 만다. 그럴 때 차 한 잔과 크림이 가득한 케이크 한 조각은 그 날카로움을 약간이나마 막아준다. 편안한 날 별로 없는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더욱 자주 케이크가 필요하다. 

웨인 티보는 이미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이가 아니었을까? 부드럽고 풍부한 케이크 앞에서 날카로움을 다스리도록 권하는 포근한 그림 하나가 오늘도 우리 앞에 다정한 위로를 준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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