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11 16:27

(3) 서울 재탈환-1

>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아군은 이미 소개한 대로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 안성 인근의 입장이라는 곳에 전투 지휘부를 차린 한국군 1사단은 전체 유엔군과 함께 반격에 나서야 했다. 더 밀릴 경우 한국의 운명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이제 반격의 때는 왔다.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그런 무렵에 나타난 용장(勇將)이었다. 그는 강력한 공격력을 앞세워 중공군의 예봉을 꺾고 서울을 탈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차를 앞세운 위력 수색이 벌어졌다. 강력한 공격력으로 무장한 선두를 앞세워 수색을 펼치면서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그로써 적의 공격력, 반응력, 부대의 위치 등을 알아내고자 하는 의도였다. 중공군 진지를 향해 미군의 포격이 가해지는 장면의 사진이다.

 

> 고지에 올라 적의 부대 위치 등을 살펴 포격 지점을 알리는 한국군 관측병들의 모습이다. 리지웨이의 반격 작전에 따라 전선은 다시 활발해졌다. 한국군 또한 부대의 전력을 추스른 뒤 활발하게 전선에 나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서울 한강 이남에서 잠시 출몰하곤 했다. 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 일부는 이 무렵에 전선의 중심을 동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강한 미군을 상대하느니 약한 한국군을 공격한다는 작전 의도였다.

 

> 한국군 1사단의 전진 상황을 찍은 사진이다. 전차와 함께 보병이 전진하고 있다. 보전(步戰) 합동작전이다. 전차는 강력하지만 보병의 호위가 없으면 무용지물이거나, 적어도 적의 손쉬운 먹잇감일 수 있었다. 반격은 적의 언저리에 탐침(探針)을 은밀히 집어넣는 일과 같다. 적이 구축한 세력의 크기, 저항의 정도, 부대 배열, 공격력과 방어력을 알아내는 일이 먼저다. 아군은 37도선에서 서서히 북상했다. 중공군은 주력을 동쪽으로 우회한 흔적이 역력했다. 서부전선에서는 따라서 적의 격렬한 저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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