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14 16:25
한국 최고의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잠실 일대의 스카이라인이다. 너른 뽕밭에서 누에를 키워 실을 뽑던 옛 조선의 잠업 단지가 이제는 고급 아파트 쇼핑 단지로 변했다.

조선시대 누에를 쳐서 비단실을 뽑는 양잠養蠶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누에가 토해내는 명주明紬실이 비단, 곧 실크의 원재료다. 옷감을 뽑을 수 있는 여건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과거 왕조 시절에는 비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양잠사업이 곧 국가적 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사農事와 함께 이 양잠은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농잠農蠶이라든가, 농상農桑 등의 단어가 만들어졌다. 농사 일반을 일컫는 農(농)이라는 글자와 양잠을 가리키는 蠶(잠), 桑(상)을 함께 병렬한 엮음이다. 桑(상)은 뽕나무가 우선 새김이지만, 그를 먹고 자라는 누에, 나아가 양잠의 뜻까지 얻은 글자다. 어쨌든 두 단어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 왕조는 농사 못지않게 양잠을 중시했다는 얘기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민간의 양잠사업을 적극 권장했던 모양이다. 조선 3대 왕인 태종의 재위 16년인 1416년에 경기도 가평 등 두 곳에 최초로 조선의 잠실蠶室을 설치한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의 잠실은 왕실 또는 관아가 직접 설치한 누에 키우는 장소를 일컫는다. 1417년에는 경기도의 두 잠실 외에 개성과 청풍, 태인 및 수안 등 지역에 도회잠실都會蠶室을 세운다.

여기서의 都會(도회)는 ‘집중적인 장소’의 새김으로 보면 좋다. 따라서 都會蠶室(도회잠실)은 번듯한 규모와 시설을 갖춘 양잠 장소라고 풀 수 있다. 이런 조치를 통해 조선은 전국 8도 중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모두 도회잠실을 두었다고 한다.

선잠先蠶이라는 단어도 있다. 우선은 양잠을 관장하는 신神을 일컫는 명사다. 나중에는 양잠과 관련이 있는 제사의 의미도 얻었다. 조선에서는 임금의 부인, 즉 왕비가 이런 행사를 주도했던 듯하다. 서울에 만든 잠실은 왕비의 그런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태종 다음의 임금 세종에 이르러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에 내잠실內蠶室을 설치했고, 지금의 뚝섬 인근에 외잠실外蠶室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잠실은 한강 이남에 있지만, 원래는 한강에 난 섬이었다. 앞의 역 이름인 신천新川, 즉 새내와 샛강이 바로 오늘의 잠실을 이룬 주역이다. 어느 땐가의 큰 홍수로 이 신천이 생기면서 지금의 잠실 땅을 섬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잠실 일대는 1970년대에 개발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강남의 땅으로 만들어졌다. 강북의 땅이 섬으로, 그 섬이 다시 강남의 핵심 요지로 개발된 셈이다.

이럴 때 흔히 쓰는 성어가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뽕나무 밭(桑田)이 푸른 파도 넘실대는 바다(碧海)로 변했다는 성어로, 아주 커다란 변화, 이루 형용키 어려운 변신, 나아가 세월의 무상함을 일컫는 말이다. 강 북안의 땅이 섬으로 변했다가, 강남의 땅으로 다시 변했으며, 이제는 고급 아파트 단지와 최첨단 쇼핑 장소로 변했으니 그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성어가 이 땅에 딱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마침 잠실이 뽕나무가 자라 누에를 키웠던 조선의 蠶室(잠실)이었으니 그 성어와 꼭 들어맞는 경우다.

양잠이 매우 발달했던 옛 중국에서는 누에 키우는 잠실을 지을 때 많은 점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잠을 위한 전용실, 다른 용도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겸용兼用의 시설, 간소하게 지은 간이簡易 잠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전용실의 경우에는 누에의 씨랄 수 있는 잠종蠶種을 키우는 곳으로 사용했고, 그로부터 조금 자라나 기르기가 수월해진 누에는 겸용 잠실이나 간이 잠실에서 키웠다고 한다.

누에의 씨, 즉 蠶種(잠종)을 키우는 잠실은 우선 따뜻해야 했다. 열을 내서 방안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야 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 누에가 병균 등에 감염되는 일도 막아야 했다. 불을 때서 따뜻하게 덥힌 방에 통풍의 기미도 없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실리콘으로 창 틈새 등을 철저하게 막은 아주 폐쇄적인 공간이었을 테다.

중국에서도 이 蠶室(잠실)이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새김은 우리와 같다. 명주실을 뽑기 위해 누에를 키우는 곳이다. 그러나 그 다음 뜻으로 넘어가면 아주 아연해지기 십상이다. 후에 번진 2차적인 새김이 바로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宮刑과 동의어로 발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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