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14 17:06

(3) 서울 재탈환-2

>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지금은 없어진 옛 광화문 중앙청사 앞에서 선전용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중공군은 3차 공세 끝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 전쟁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앞서 중공군은 3차 공세의 과정에서 함경도 장진호 일대를 공격하다가 미 1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수많은 피해에 직면했다. 3개 군단 이상의 군대가 더 이상 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명의 희생이 컸고, 동상에 걸린 수 만 명의 병력이 원활한 부대 기동을 어렵게 했다. 비록 서울 점령에는 성공했으나 불안감이 짙어지던 상황이었다.

 

> 차분한 반격을 준비하는 아군의 모습이다.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한국군 1사단의 모습이다. 이들은 미 8군 사령관 릿지웨이 대장의 지휘에 따라 우선 37도선으로 후퇴한 뒤 반격에 나설 태세였다. 중공군은 그런 아군의 움직임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서울의 한강 남쪽으로 부대를 전진시키는 대신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미군에 정면 대항하는 길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상대해 전신돌파를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엔군 안의 영국군, 캐나다군 등의 반격에 중공군은 때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릿지웨이 사령관은 강력한 화력을 동원해 ‘적군 섬멸’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새로운 양상이 전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눈 덮인 산야에서 추위를 뚫고 전진하는 한국군 1사단 장병들의 모습이다. 중공군은 곳곳에서 발이 묶였다. 동부전선에서 취약한 전력의 한국군 공격에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으나 미군과 프랑스 군대가 주둔한 경기도 지평리에서는 5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미군 1개 연대 프랑스 1개 대대가 뭉쳐 이룬 방어막을 돌파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공세가 이제는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징후임이 매우 뚜렷했다. 아군 전체 병력은 서울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고 있었다.

 

> 6.25전쟁 당시 물자와 공중 강습 병력을 실어 날랐던 C-119 수송기가 카메라 앵글에 담겼다. 완연한 상자 모습의 수송기라서 ‘플라잉 박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6.25전쟁은 현대전의 특징이 잘 드러난 싸움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로 물건을 옮기는 보급, 때맞춰 나타나는 중장비로 하천 위에 다리를 놓고 막힌 길을 뚫는 공병의 능력, 가공할 살상력을 보이는 강한 무기 등이 전선의 주축을 이룬 전쟁이었다. 미군은 막강한 화력에 뛰어난 보급력, 상대가 흉내 낼 수 없는 기민한 공병 작전으로 3차 공세까지 우세를 보였던 중공군을 크게 압박하고 있었다. 평안남도 남쪽 끝에 주둔하던 중공군 총사령부의 고민은 그에 따라 점차 깊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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