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15 08:30

미니멀리스트가 쓴 '아무것도 없는 집에 살고 싶다'와 미니멀리즘 드라마 '우리집엔 아무것도 없어'를 보면서 내 방에 꽉 찬 이 엄청난 물건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일어난 기상 변화로 인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잠결에 진동이 와서 이 책장이 무너지면 나는... 나는

주섬주섬 책과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뭔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책은 제일 좋아하던 일본 미술사 수업 때 샀던 책이라서 못 버리겠고,

이 책은 너무 열심히 줄 긋고 플래그를 붙인 책이어서 못 버리겠고, 

이 책은 여행을 함께 갔던 친구같은 책이라서 못 버리겠고, 이 책은 첫 제자가 사준 책이라서 못 버리겠고,

이 옷은 햇살 뽀얗던 네팔에서 사 온 전통 의상이라서 못 버리겠고,

이 옷은 처음 입었던 날 면접에 합격했던 행운의 옷이라서 못 버리겠다.

지난 물건들을 끌어안고 사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지난 마음들을 간직하는 방법들에 대해 생각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떠올랐다.

방을 가득 채운 장미의 그림.

Rene Magritte <The Tomb of the Wrestlers> 1960

초현실주의의 브레인, 르네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사용하여 낯선 환경을 만들어낸다. '방 안을 꽉 채운 거대한 꽃'이라는 불가능한 상황, 이러한 비현실적인 크기의 전환. 

이 비합리적인 공간 안에서 현실을 벗어난 거대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레슬러의 무덤>이라는 제목조차도 이 비현실성을 더욱 얇고 팽창하게 만든다.

이렇게 거대한 꽃이 있을 수 없는 현실, 이러한 비좁은 공간이 불가능한 누군가의 방이야말로 이 공간이 놀라운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공간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 이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Rene Magritte <The Listening Room> 1952

사람의 마음에는 작고 커다란 방이 여럿 있다.

빵이 있는 방도 있고 꽃도 있는 방도 있다.

책이 가득한 방도 있고 인형이, 로봇이, 자동차가 가득한 방도 있다.

낙서가 가득한 방도 있고 물감이 차곡차곡 쌓인 방도 있다.

이러한 마음의 방들은 때때로 현실에 드러나기도 한다.

나의 현실에 꽃이 절실한 날, 마음에 머물던 꽃은 향기로 드러나고,

나의 현실에 책이 절실한 날, 마음에 머물던 책은 꼭 필요한 구절을 내어준다.

나의 현실에 따뜻함이 절실한 날, 마음에 머물던 음식의 온기가 힘을 낼 곳으로 잡아끈다.

현실뿐 아니라 마음에도 정리가 필요하고 분리수거와 재활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에 가득한 것들을 시원스레 내어버리는 일은 나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련하게도 저 많은 물건들은 이 마음의 방에서 퇴출되지 못했다.

미련이 많은, 미련한 인생이다.

그러나 추억이 많은 인생이다.

아마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이 미니멀리스트가 되어보려다가 포기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미련 많음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은 물건들이 그들을 지켜 주기를 바란다.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 미련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에 추억들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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