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17 10:29

유독 걷기를 좋아해 걷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도 올레길이며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러 날을 잡는 사람들뿐 아니라,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걷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해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걷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딘가에 닿고야 만다는 이야기, 걷는 동안에는 몸의 감각이 세상과 조우하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는 이야기, 먼 거리의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육체적 피로가 너무나 달콤하다는 이야기, 생각할 거리가 있으면 꼭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 이야기는 각각 다르지만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걷는 동안 자신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음이 걷고픈 욕망의 본질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브론즈 작품 <걷는 사람>은 그러한 사람들의 바람을 구현해놓은 것 같다.

Alberto Giacometti <L’Homme qui marche II (Walking Man II)> 1959&#8211;60 &#169; Succession Giacometti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인간의 내면적 고독과 덧없음에 천착했던 알베르토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친밀하게 교류했다. 그들 사이에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들이 오갔을 것은 당연하다. 자코메티의 괴상한 직관력과 상상력, 표현력은 사르트르에게 자극을 주었고, 자코메티는 네 살 연하의 사르트르를 몹시 좋아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을 자코메티가 작품으로 풀어내는 데 감격했다. 그들은 예술과 문학이라는 각자의 도구가 달랐을 뿐, 인간의 실존을 추구하는 데 있어 실로 닮은꼴이었다.

삶의 덧없음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휙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인체, 툭 치면 부러질 것만 같은 가느다란 뼈대, 무언가에 긴장하고 있는 듯한 경직된 모습, 뼈대에 간신히 붙어 있는 듯한 상처처럼 거친 흙 자국의 표면.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겉껍질 아래에는 모두 다 같은 모습의 부실함이 있다는 것을. 매일 조금씩 사라지면서 무(無)에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러한 자코메티의 인체는 ‘멘탈’이 한껏 쪼그라든 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을 잘 표현한다. 볼륨을 과감히 생략해버린 시든 몸을 빌어 그 위축된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낸다. 자코메티가 살았던 20세기의 현대인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현대인을 비교해 봐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삶의 편리는 눈에 띄게 발달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불안한 존재이며, 삶은 여전히 불안정해 휘청거리고, 당장 내일 일을 몰라 우왕좌왕한다.

Henri Cartier-Bresson photo <Alberto Giacometti> ⓒHenri Cartier-Bresson

‘걷는 사람’에서는 움직임의 느낌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걷는 순간을 포착했지만 전혀 역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지된 순간 같다. 걷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동세 없음은 오히려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걷는 사람의 공간이 현실이 아닌 공간인 듯한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내면의 절박한 고독과 존재를 확인한다면, 그 순간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 이상의 존재가 있는 공간은 그 존재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한 시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경험하고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성찰이 이뤄진다. 성찰은 불안감을 다스리고 본질의 모습을 일으켜 세운다.

이 비루한 몸을 가지고 한 걸음씩 걷는 순간 내가 확실히 존재함을 확인한다. 적어도 걷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이 순간 걸어가는 나는 세상에 발을 디디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무게 중심을 옮기고, 위치를 이동한다. 이러한 존재의 확신은 자신의 '있음'에 충만한 세계를 확인한다. 잠시나마 이 충만함은 쪼그라든 ‘멘탈’의 공허함을 채우고, 휘청거리며 살아 있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한다. 조금씩 이 순간들이 연속된다. 가늘고 길게 이어져 나간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이렇게 시들고 연약한 인간이 용기를 내어 삶을 이어나가다니 대단하다.

걷기는 가장 쉽게 존재를 체험하는 행동이 아닐까. ‘멘탈’이 붕괴되었을 때, 걸으라. 일에서 답이 안 나올 때, 걸으라. 곁이 없어 고독할 때, 걸으라. 가질 수 없어 고통스러울 때, 걸으라. 하루 더 살기 위해 걸으라. 살아남기 위해 걸으라. 걷고 또 걷는다는 단순한 행동의 연속만으로 존재는 견고해지고 ‘멘탈’은 온전해질 테니.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