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18 16:18

(3) 서울 재탈환-3

> 경기도 여주에서 서울 탈환을 위한 마지막 회의를 위해 모였던 유엔군 야전 지휘관들이 회의를 마친 뒤 촬영한 사진. 1951년 2월 무렵이다. 오른쪽 첫째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 둘째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셋째가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다섯째가 백선엽 한국군 1사단장이다. 이 여주 회의에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적을 향한 강력한 공격을 주문했다. 아군은 그에 따라 안성의 북위 37도선에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중공군은 2~3차 공세를 벌이다가 발생한 심각한 병력 및 물자 손실로 반격다운 반격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울러 서부를 우회해 동부전선으로 향하던 중공군 대규모 병력은 경기도 지평리와 가평 등 지역에서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의 반격에 말려 또 다시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 반격을 향한 대열 고르기에 들어선 한국군 1사단의 모습이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각오에 따라 반격의 숨을 고르던 한국군 1사단은 리지웨이 사령관의 명령이 내려진 뒤 치밀한 진군 채비에 나섰다. 병력 손실이 없던 1사단은 서울 탈환의 선보에 나섰다. 안성 인근의 입장에서 북상해 영등포와 흑석동으로 접근한 뒤 강을 넘어 마포에 상륙해 곧장 서울 도심인 광화문 인근을 지나 서대문으로 향하는 진격 노선을 배정 받았다.

 

> 비록 눈앞에 출몰하는 중공군 병력은 적었으나 전쟁터가 늘 그렇듯 적이 지닌 유무형의 모든 역량에 주목해야 했다. 1사단 병력이 전차와 함께 늘어선 뒤 진격 채비를 다지는 장면의 사진이다. 역시 서울 탈환을 앞둔 1951년 2월 말 무렵으로 추정한다. 이 무렵 아군의 사기는 높았다.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구사하는 입체적인 화력망 구성이 주효해 동부 전선에서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잇따라 아군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울로 가까워지면서 전투는 접전의 형식으로 자주 벌어졌다. 그럼에도 뭉근한 힘을 앞세운 미군의 지원으로 중공군은 점차 밀려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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