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19 14:26

30여년 전 우리 가족은 응봉동의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가까운 곳에 학교가 없어 30분은 족히 걸리는 학교를 찾아가 전학 수속을 밟았다. 잘 닦여진 인도가 없던 곳이라 학교를 가려면 굽이굽이 높은 언덕을 지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쳐야 했다. 다리가 고달픈 등하굣길에는 얇은 나무판자로 겹겹이 쌓인 집들이 있었다. 중간 중간 비닐로 벽을 채운 집도 있었다. 여러 사정으로 그 학교를 다닌 것은 반년도 채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 동네는 매일매일 급격하게 바뀌어 갔다.

집들이 매일매일 사라졌다. 대신 비닐과 시멘트와 쓰레기로 가득 찬 마대자루들이 늘어났다. 낯설고 먼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매일 달라지는 풍경을 보던 어린 나는 싸늘한 추위를 느꼈다. 매일 부서지고 매일 사라지는 공간을 보면서 기운이 빠졌다. 부서진 가재도구와 구겨진 옷가지, 흩어진 신발이 섬뜩했다. 집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떠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건축이라는 단어를 알아가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쓸쓸한 경험이었다.

시간은 지나가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운이 좋아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분이 조소를 배웠던 유영호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작품 '달-봉천2동' 때문이었다.

유영호 <달-봉천2동> 시멘트, 나무, 철 240×417×317cm 1995

선생님의 개인전에 찾아갔다. 개인전이라는 행사는 당시 처음 경험하는 이벤트였다. 다른 소품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키보다 훨씬 큰 ‘달-봉천2동’ 작품이 지하의 작은 갤러리를 꽉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 시멘트와 나무조각으로 만든 집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나무조각으로 창문과 문을 만들었다. 벽은 거칠었고 시멘트로 발라져 있었다. 시멘트에 물감을 섞은 것일까? 얼룩진 색이 좀 달랐다. 켜켜이 쌓인 조형물은 세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임석재 건축가는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북하우스, 2000) 에서 유영호 작가를 서울의 선신(善神)이라고 칭한다. "달동네의 올망졸망한 군상을 조각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모더니즘 문명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을 도시의 기억 속에서 찾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그 평가에 동의한다. 통증 생생한 기억의 시간 속에서 1995년 ‘달-봉천2동’과의 만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내게 이 작품이 중요했던 이유는 내가 경험했던 쓸쓸한 마음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응봉동이나 옥수동을 지나칠 때면 늘 시멘트 얼룩진 이 작품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했던 집들은 사라지고 높다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옥수동 일대는 부동산 투자하는 데 핫한 지역이라고 한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우스울 정도다. 그러나 내가 간직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내게 응봉동은 쓸쓸한 그들이 있던 곳이다. 비록 공간은 변화했지만 공간에 머문 기억은 남았다. 나 아닌 누군가가 간직한 기억도 마찬가지로 생생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 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없다. 그리운 마음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기억은 생명을 잃지 않는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쉬이 잊히지 않는 것이 되기를.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기억되어야 하고, 존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아야 하기에.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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