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영
  • 입력 2016.10.21 10:23

삼 년 동안 공부했던 시험에 합격한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수험서가 아닌 책을 읽는 것이었다. 신입으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었는데도 그간 눌러왔던 욕망은 거대했다. 허기진 사람이 밥을 찾듯이 책을 파먹었다.

가방에 두세 권의 책을 항상 넣고 다녔고 자투리 시간마다 책을 읽었다. 퇴근하면 자주 도서관에 들렀다. 하다하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분철해 들고 다니기도 했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필사해 보기도 했다. 함께 멋진 책을 읽는 친구들이 있었고 모이기만 하면 놀라운 책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나 좋았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균형감각이 발달해서인지 어떤지 지하철뿐 아니라 버스에서도 어려움 없이 책을 읽었다. 업무가 버겁고 시간이 없어 점심 급식을 끊고 책을 읽었다. 체육관에서 농구 연습하는 학생들의 곁에서 짜증을 참으며 책을 읽었다. 돈도 시간도 실력도 없어 초라했던 초보 교사 시절이었지만 그 때는 책을 읽을 자유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Jan De Maesschalck <Untitled> 2001 31,7 x 42,2 cm acryl, acrylmedium on paper

벨기에 화가인 얀 데 마에세차크 Jan De Maesschalck (1958~)의 책 읽는 그림을 보았을 때 추위 가운데 책을 읽을 온기가 간절했던 내 어떤 겨울날이 떠올랐다. 시청 삼성플라자 앞에서 총총히 기다리던 빨간 광역버스는 쉬이 오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  머리카락은 휘날렸고 장갑 낀 손끝은 얼어붙도록 추웠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야 하는 십 분 이십 분 사이 읽다 만 책이 간절해졌다. 은행 ATM 박스에 들어가 얕은 온기에 기대어 장갑을 벗고 책을 읽었다. 빨간 띠지가 그려진 뤽 낭시의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이었다. 돈을 찾을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나는 꽤 평화로웠다. 번번이 나갈 타이밍을 놓쳐 버스 두 대를 보내고 나서야 유리박스에서 나와 차를 잡아탔다. 그날의 나 자신을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워 피식 웃게 되면서도, 그날의 간절함이 되살아나 조금 뜨거워진다.

얀의 그림 ‘무제’에서의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는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불빛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다. 어두컴컴한 밤길, 이 공중전화박스 안의 불빛은 희미하지만 독보적이다. 묵직한 질감의 코트를 입고 있으니 날이 꽤 추운 것이 아닐까? 높이 달리지도 않은 전구 아래 턱과 입술을 뾰족이 내민 여자는 여간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간쯤 읽어가고 있는 푸른 표지의 두꺼운 책은 어떤 내용일까? 책을 펴는 순간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는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책일까, 혹은 당장 내일 테스트를 위해 깊이 공부해야 하는 수험서일까? 이 전화박스는 책이 간절한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 유일한 장소다. 지금 이 순간 열망을 채워주는 놀라운 장소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 ATM 박스가 그러하였다. 춥고 고달픈 겨울밤의 간절했던 순간 추위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던 곳에 나의 구원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를 고립시켰던 책 속에 나의 구원이 있었다.

인생은 자주 춥고 고달프고 얄궂다. 하지만 인생은 때때로 다정하다. 우리의 간절함을 보호하는 그 다정한 구원 때문에, 우리는 삶에 대한 열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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