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24 09:27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학부모님이 친정 농사라며 한라봉을 한 박스 보내주신 적이 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이틀을 고민하다가 보내주신 분께 전화를 드리고 학생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마흔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신이 나서 한라봉을 까먹었다. 내가 그 일을 내내 잊지 못하고 감사하는 이유는 교실을 가득 채웠던 향기 때문이다. 그 향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다른 반 학생들이 달려와 창문에 달라붙었다. 아이들은 이 껍질을 버리지 않고 말리겠다고 창틀 위에 빼곡히 올려놓았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향기가 들썩였다. 아직도 그 향기가 코끝에 내내 맴도는 것 같다.

그날 이후였다. 가장 좋아하는 향기를 자신 있게 이야기하게 된 것이. 한라봉뿐 아니라 천혜향 같은 감귤 친구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값나가는 그 과일들을 먹게 되면 껍질을 바로 버리지 않고 며칠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꼭 그런 감귤 향이 나는 시트러스 향의 프레시 헤스페리데스 향수를 몇 병째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도 그때 즈음부터였다.

이세 모노가타리의 시 ‘귤꽃’을 읽었을 때에도 코끝에는 향기가 고였다. "오월 기다려 피어나는 귤꽃 향기를 맡고 있자니 / 친숙했던 옛 사람 소매 향기가 난다" 라는 구절은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 그리고 역으로 감귤을 깔 때마다 이 노래는 항상 나의 가슴에 떠올라 소매를 한 번 더 신경 쓰게 했다.

Raul Prado Lozano <Mandarina>

멕시코의 화가인 라울 프라도 로자노 Raul Prado Lozano (1982~) 의 감귤 그림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돌토돌하게 둥근 수분막이 살포시 찢긴 외피와 그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노란 과즙, 얇은 반투명 내피와 그 사이의 하얀 중간막,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어 나오는 풍부한 향기가 화면을 뚫고 퍼져 나오는 듯했다. 시각이 후각을 작동시킬 정도로 그렇게나 이 향기는 강렬하다. 추운 계절을 내내 함께하는 감귤은 맛이며 향기며 얼마나 완벽한가.

어떤 향기는 그리움을 가져온다. 내가 감귤 향기를 통해 그때의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이세모노가타리의 관리는 감귤 향기를 통해 전처와의 순간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때 남겨진 노래가 지금의 나에게 감귤 향기와 그리운 소매 향기를 영영 잊지 못하게 한다. 어디 나의 경험과 그런 글줄의 이야기뿐이랴, 기나긴 겨울의 낮밤과 달콤한 인간의 우연이 만든 향기 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 텐데. 그렇게 그리운 향기가 늘어날수록 어떤 인간의 삶은 더욱더 풍부해질 수밖에.

Raul Prado Lozano <Mandarinas>

추위는 다가오고 감귤의 계절이 다시 시작되었다. 올해의 막바지에도 감귤과 함께하는 우연들이 놀라운 추억들을 만들고 그리움을 만들기를. 물론 꼭 감귤이 아니어도 된다. 그리움은 조금 아프지만 분명 멋진 것이기에. 추운 겨울날 다시금 그리워할 것들을 무엇으로든 얼마든지 만들어도 된다. 당신의 그리움은 더없이 멋지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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