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24 10:49

(3) 서울 재탈환-4

> 앞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정황이 있다면 군대는 나아가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1951년 3월 중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을 탈환하러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은 한강 남안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직 서울 어딘가에 모습을 감춘 채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얼음이 풀려 땅이 녹는 해토기(解土期)에 앞서 서울에서 물러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 전역에는 중공군이 거의 없던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게 군대의 일이다. 한국군 1사단은 부지런히 흑석동~영등포의 한강 남안에서 강 너머의 서울 적정을 탐색하기에 바빴다. 사진은 일부 수색 병력이 조그만 보트로 중공군 점령 하의 서울을 탐색하기 위해 강을 건너던 무렵의 장면이다.

 

> 한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참모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인으로서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화교(華僑) 병력을 소집했다. 그들을 훈련시킨 뒤 한강 북안으로 투입했다. 중국말을 할 줄 알았던 그들에게 중공군이 서울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곧장 강을 넘었고, 알차다 싶은 정보를 입수했다. 중공군 병력은 얼마 남지 않았으나 일부 지역에서 아직 머무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 화교 수색대의 일부는 중공군과의 교전에서 숨지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남아있더라도 중공군이 대규모 접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1사단 활동이 부쩍 잦아졌다. 부지런히 강을 넘어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부대 전체가 강을 넘는 날은 3월 15일로 정해졌다.

 

> 흑석동과 영등포 일대에서 마포 쪽으로 다가서 뭍에 오르는 작전 방향이 정해졌다. 강을 넘는 동안 중공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미군이 급히 공급한 수륙양용의 상륙함이 왔고, 1사단 병력은 그에 올라타 마포로 접근했다. 드디어 선발대가 마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중공군은 병력 이동이 매우 어려운 해토기를 피해 유엔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전 이미 본대 병력을 철수시킨 상태였다. 마포 사장(沙場)으로 뭍에 오른 한국군 1사단이 서울 시내를 향해 진군하는 장면의 사진이다. 비록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으나 나아감에 신중을 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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