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25 16:09
서한 말엽에 활동했던 공자의 20대 손 공융(孔融)의 상. 강인한 성격으로 당시의 실권자였던 조조와 갈등을 빚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실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 멋진 사내들이 모여 로망을 펼쳤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수호전(水滸傳)>이다. 108명의 두령이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에 모여 의적(義賊)으로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그 배경이 바로 산둥이다. 이점 때문에 ‘산둥→수호전의 양산박→좋은 사내’라는 이미지가 박혔는지 모르겠다.

그런 산둥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공융(孔融)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는 몰라도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삼국지(三國志)>속의 조조(曹操)와 동시대 사람으로, 둘은 사실 매우 깊은 악연(惡緣)으로 맺어졌던 사이다.

공융은 또한 공자의 20대 후손이기도 하다. 역시 태어난 곳은 산둥이다. 먼 할아버지인 공자의 핏줄을 이었음은 물론이고, 공자가 활동했던 노나라의 예악적인 전통도 매우 강하게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의 성격은 중국 식 표현을 따르자면 ‘작은 것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不拘小節), 자신의 재능을 믿어 자신감을 보이며(恃才負氣), 강직한 성격으로 아부하지 않는다(剛正不阿)’다.

그에게 따르는 일화는 꽤 많다. 먼저 어릴 적 이야기다. 열 살 소년이었던 공융이 당대의 이름난 명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이응(李膺)이라는 이 유명한 고관 집에 도착한 공융은 다짜고짜 “이응 선생의 친척이 찾아왔다고 알려라”고 한다. 그러나 공융을 문에 들인 이응은 “네가 왜 내 친척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공융은 “선생의 먼 조상인 노자(老子)와 제 조상인 공자가 서로 스승과 제자로써 맺어졌으니, 당신과 나는 조상 대대로 친분을 맺은 사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열 살짜리 소년의 배포와 기지(機智)가 대단해 보이는 대목이다.

어이가 없었겠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이응은 그 때 찾아온 한 손님에게 공융의 이런 면모를 전했다. 역시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였던 이 손님은 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똑똑한 사람이 커서는 꼭 잘 되지 않는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공융이 “아, 그러니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 매우 똑똑했겠군요”라고 되받는다. 보통의 재치가 아니다. 그러나 입이 너무 빠른 게 단점일까.

당시의 조조는 한(漢)나라 헌제(獻帝)의 최고 권신(權臣)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런 조조를 두고 “곧 한나라 황실을 잡아 내리고 황제에 등극할 야심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조는 실제 황실의 최고 신하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대권까지 넘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조정의 수많은 대신과 관료들은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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