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26 10:09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시인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간다. 물론 좋아하는 것과 기억력은 꼭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들었던 것 같은 이야기도 들을 때마다 새롭기에 강의는 늘 즐겁다. 윤동주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동양고전을 배웠고, 기독교 가정에서 성경을 읽었으며, 도스토옙스키와 키르케고르에도 영향을 받았다.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과 백석 시인에게서도 시의 양분을 얻었다.

윤동주 시인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도 영감을 받았다. 그는 고흐를 아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고향집에 올 때 꼭 수많은 책들을 들고 왔는데, 그때의 소지품으로 고흐의 화집이 있었다고 한다. 시인이 지극히 사랑했던 대상이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물 흘리는 자, 눌린 자'였다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그가 고흐를 좋아했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고흐 역시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다친 자, 노예 된 자를 지극히 아끼고 마음에 품었다. 목사가 되어 그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쓰려고 했었으나 목회자의 직업은 그와 맞지 않아 곧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조심스레 그런 일들을 그림에 담았다.

들라크루아의 '선한 사마리아인'(왼쪽)과 이를 모사한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

특히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작에는 그가 사랑했던 '가난하고 아프고 슬 자'들이 많이 나온다. 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기에 존경하던 대가의 그림을 모작하기를 좋아했는데, 가장 많이 모작한 것은 역시 밀레였다. 땅을 파고 노동하여 정직하게 그 대가를 얻는, 그러나 늘 가난한 농민의 삶은 밀레를 매혹시켰고 이윽고 고흐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수많은 모작 중에서 특이한 것은 들라크르와의 그림이다. 유진 들라크르와의 작품 '선한 사마리아인'을 참고로 그려낸 작품이다.

원작인 들라크르와의 그림과 빈센트 반 고흐의 모작은 좌우가 반대로 되어 있다. 들라크르와의 그림이 인쇄 형태로 복제되면서 반전되고 보급되어 고흐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죽어가는 자 유대인은 강도에게서 돈과 옷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반 죽음이 된 상태로 사마리아 사람에게 발견됐다. 그를 발견한 독실한 종교인과 높은 신분의 사람은 그를 지나쳐 갔지만 천하다고 홀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구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치료받게 해 준다.

이 모작에서는 고흐 특유의 꿈틀거리는 터치가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도드라진 말뿐 아니라 배경에서의 바위, 나무까지도 살아 숨 쉬는 듯 꿈틀거린다. 몸을 가누기 힘들지만 사마리아 사람을 꼭 붙든 팔의 긴장감이 두드러진다. 상처가 고통스러워 굽어버린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저 멀리 지나가 버린 높은 신분의 사람조차도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비록 들라크르와가 표현했던 깊은 공간감은 사라져 버렸지만 평면화된 화면에서 생명력이 꿈틀꿈틀 솟아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사마리아 사람'이지만 주인공은 두 사람 각각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상처받은 자와 천하다고 멸시받은 자. 이 두 사람이 각각 서로를 구원한다. 상처받은 자는 멸시받는 자로 인해 생명을 구원받고, 멸시받는 자는 누군가를 구함으로써 높은 사랑을 구현한다.

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생각하면서 논어의 '愛之欲其生(애지욕기생)'을 기억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되새긴다. 그가 베푼 사랑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이 계속 아름답게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애틋한 힘, 애틋한 기쁨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살게 하는 사랑이라면 강하고 높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가장 높은 사랑을 구현했다. 그 사랑 때문에 '누군가'인 우리 하나하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모여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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