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31 10:08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아찔하다. 사람 가득한 지하철은 실제로도 산소가 부족할 것이 분명하지만, 엄청난 인파 사이에 부대껴 먼 거리를 서서 갈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다. 어쩌다 버거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날, 누군가와 마음이 버성겨진 날은 더욱더 기운이 빠진다. 세상이 나를 버린 듯 얼마나 서럽기만 한지. 티는 안 내지만 울고 싶다. 거기에다 월급날이 가까운 날이면 말할 것도 없다. 얄팍한 지갑의 주인에게 용기란 없다. 기운이 나는 비싼 밥 한 끼 지르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매일 전단지를 돌리시는 할머니 한 분은 나를 보면 반가워하시며 전단지 두 장을 쥐어주신다. 길거리에서 돌리는 전단지는 꼭 받는다. 내가 한 장이라도 더 받아야 그분들이 조금 일찍 집에 돌아가실 테니 말이다. 몇 주 전부터 할머니 한 분이 더 나타나셨다. 날은 더욱 추워져 간다. 인생이 왜 이리도 고달픈 것인지 거의 매일 생각하게 된다.

고달픈 인생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고달픈 인생의 대명사 같은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대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다.

Vincent Van Gogh <The Potato Eaters> 1885 81cm x 114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의 무서움이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가난함과 고단함이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에게 가난은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가난함이다. 사실 가난함에서 대부분의 고난들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1885년 빈센트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동생 테오의 생일 선물로 보내려고 준비했으나 그리하지 못 했다. 그러나 고흐는 편지에 이 그림에 대한 포부를 적어 보낸다. 고흐는 농촌의 삶을 감성적으로 다듬어 그려내기보다 거칠고 투박하게, 미화 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가 존경했던 밀레가 농민의 노동을 거침없이 그려냈듯이 그 역시 농민의 고달픈 삶과 가난함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다.

어두움 가운데 간신히 켜져 있는 램프의 빛에 기댄 다섯 명의 사람들. 작은 식탁에 모여 간단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식탁 위에는 그릇조차 충분하지 못하다. 식탁 중간에 놓인 커다란 쟁반 같은 접시 위에 삶은 감자들이 조각난채 올라가있을 뿐이다. 방금 삶은 감자인 듯 접시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다. 낡은 식탁의 갈라진 모서리가 서글프다. 식사 중인 사람들은 빈말로라도 예쁘다거나 잘 생겼다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 없는 행색이다. 딱 보아도 볕에 상해서 탄력을 잃고 늘어진 피부와 그늘져 푹 들어간 눈과 뺨, 둥글게 굽어버린 등이 그들이 겪어온 노동의 시간과 강도를 드러낸다. 야위디 야윈 그들이 입고 있는 어두운색의 옷 역시 노동을 위한 용도일 뿐이다. 옷과 모자 모두 잔뜩 구겨져 있다. 빳빳하고 깨끗한 부분이라고는 한 부분도 없다. 아아, 이 삶은 왜 이다지도 가난하기만 한 것인가. 이 초라한 식탁 가운데 서로를 바라보는 검고 큰 눈망울이 선하게 보여서 더욱 슬프기만 하다.

삶에는 거저 얻는 것이란 없으며 그렇게 겪어야만 하는 고단함 역시 삶의 진실함이라는 것. 고흐의 그림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 우리가 아픔 어린 감동을 느끼는 지점이다. 사실 인간의 삶을 아무리 미화해 보려 해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은 본디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맞다. 인생은 늘 대개 서럽고 고달프다. 그것을 자의 반 타의 반 인정하고 하루하루 기꺼이 뛰어드는 용기에, 하루하루 성실히 노동하는 정직함에 인생 프로다운 내가 있다. 인간의 삶은 고생으로 뒤틀리고 옹이진 모습만큼이나 강인하고 또 겸손하다.

슬픔과 비참함과 가난과 질투와 교활함과 방해와 비열함과 서러움은 삶의 디폴트 옵션이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삶을 외면하려고 그러나. 아마추어같이. 이 아픈 진실함을 너무 미워하지 말기로 하자. 고난을 겪고 있는 인간은 이미 인생 프로 중의 프로라는 인정을 얻은 것이므로. 진실한 나와 진실한 그대여, 이번 생은 한번 그리해 보도록 하자.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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