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31 17:24
108명 두령의 지휘 아래 관군과 대결을 펼쳤던 양산박(梁山泊) 사내들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 4대 기서(奇書) <수호전(水滸傳)>의 영상물 선전 포스터.

그러나 공융만은 달랐다. 그는 조정의 회의에서나, 일반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나 그런 야심가이자 최고 권력에 한 발짝만 남겨두고 있던 조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는 체를 하면 그 지식의 천박함을 조롱하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고, 무슨 결정이라도 내리기만 하면 조목조목 근거를 들이대며 반박을 해댔다.

조조는 이를 갈았다. ‘저 놈을 언젠가는 죽여야지…’라는 생각이 움트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공융의 비아냥과 날선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공융에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그의 명성이 지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공융은 당시 기울어가던 한나라 황실의 권력 강화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그 점은 조정의 대신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는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중국 최고의 지성, 공자의 20대 후손 아니던가.

그러나 결국 조조의 분함은 극도에 달했고, 마침내 공융의 제거에까지 이르렀다. 한나라 황실의 보호를 위해 수도 1000리 안에 제후를 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융의 건의는 결국 조조의 살기(殺氣)를 키웠다.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르던 조조의 세력은 시비만을 일삼는 공융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품어왔던 천하 권력의 장악에 도달코자 했던 것이다. 결국 공융을 포함해 그 일족(一族) 모두가 처형대에 오른다.

그 때 남긴 마지막 일화가 있다. 공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일족이 모두 죽는 멸문(滅門)의 화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주변의 어떤 이가 아들들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길을 터줬다. 그러나 그 아들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새 둥지가 뒤집히는데 그 안에 있는 알이 온전하겠습니까”다. 한자로 적으면 “覆巢之下, 復有完卵乎”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어렸을 적 이응이라는 고관의 집을 찾아가 당돌하게 기지를 펼쳤던 공융이나, 일가 모든 친족이 죽는 마당에 저만 도망칠 수 없다는 그 아들이 꼭 같은 기질이다. 날이 시퍼런 조조의 권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으며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조롱과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공융의 면모가 생생하다.

우리는 이런 공융과 그 아들의 상징적인 면모에서 산둥의 인문(人文) 한 자락을 펼쳐 읽고 가야 한다. 산둥의 훌륭한 사내라고 하는 중국어 ‘山東好漢(산동호한)’은 분명 거저 나온 표현은 아니겠다. 울분을 마음속으로 가둬 새겨서 있는 듯 없는 듯 삭혀 버리는 기질은 결코 아니다. 할 말은 하는 성향이 강하며, 그냥 빠져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일에 나선다. 그리고 싸움이 붙으면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비는 성정이다. 공융과 그 아들의 기질이 그 점 하나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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