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1.01 16:54

(3) 서울 재탈환-5

> 군대는 무너질 때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이런 군대는 문제가 있는 경우다. 강한 군대는 설령 적의 공세에 무너지더라도 쉬이 등을 보이지 않는다. 등을 보이더라도 체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물러날 줄 안다. 1951년 3월의 중공군은 그 점에 비춰보면 아주 강한 군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형편없이 약한 군대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했다. 전체적인 화력과 보급력에서 떨어져 체력에서 바닥을 드러내 강한 군대라고 할 수는 없었어도, 우리의 다가서는 공세에 어지러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무튼 아군은 이해 3월 15일 한강을 넘어 중공군이 점령했던 서울을 되찾았다. 마포로 상륙하기 위해 미군이 가설한 부교의 모습이다.

 

> 서울 중앙청의 모습이다. 중공군이 점령하는 동안 상당한 수모를 겪어야 했던 곳이다. 크게 무너진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행정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곳은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채 아군의 진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도심의 주요 건물은 폭격 등에 의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서울 시내에서 중공군이 벌이는 저항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아군의 공세에 재빨리 물러섰다. 흙이 얼음으로부터 놓여나는 해토기(解土期)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해토기에 접어들면 중장비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당시 중공군 지도부의 판단은 정확했다. 어차피 서울을 점령하는 일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명분보다는 실질을 취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 한국군 1사단은 마포에서 상륙해 서울 서대문 지역에 본부를 차렸다. 1사단 장병들이 독립문을 향해 행군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중공군은 이 무렵에 이미 서울을 떠나 북상하고 있었다. 발 빠른 추가 공세가 펼쳐져야 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서울을 수습하는 일도 중요했다. 잔적(殘敵)이 서울에 남아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수색전을 펼쳐 그들을 정리해야 하는지 등이 다 중요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서울을 비운 상태였다. 별다른 접전은 따라서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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