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벼리기자
  • 입력 2016.11.07 10:13

‘하루를 견디면 선물처럼 밤이 온다’는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은 길고양이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 제목은 비단 길고양이뿐 아니라 나 같은 인간에게도 울림이 있었다. 생명 있는 존재의 삶은 대개 비슷한가 보다. 빛이 밝은 하루 동안 계속해서 달리고, 잠시 피해 있다가 일어서고, 또 다시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기면 어둠이 내리고 그때부터는 고요한 시간이 시작된다. 깊은 휴식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 세상에 휴식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주말이 좋은 이유가 그것이고 월요일이 끔찍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주말은 일주일에 단 한 번뿐. 그래서 우리에게는 매일의 밤이 있다. 그리고 그 어둠 가운데 깊은 잠이 허락된다.

이 깊은 휴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폴란드의 작가 야첵 예르카의 '침대' 그림들을 소개하고 싶다. 이 포근한 야외 공간과 온화한 불빛 가운데서 각자가 가장 원하는 휴식의 모양새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달빛 침대 The Moonlight Bed’는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이라 더욱 빛이 부드럽고 색이 풍부한 작품이다.

Jacek Yerka 'The Moonlight Bed' 2000

이 놀라운 무성한 초록, 그 가운데 깨끗하기 그지없는 침구가 놓여 있다. 호텔방에서 갓 세팅된 시트 같은 청명한 흰색의 침구, 오리털이 가득한 듯 푹신해 보이는 베개, 이 깨끗한 침구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온화한 노란 빛의 램프 아래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읽다 만듯 펼쳐진 책이 있다. 그 옆으로 두꺼운 책들이 뒤죽박죽, 그러나 시리즈별로 줄지어 있다. 맞은편에는 자명종 시계와 TV처럼 보이는 전자제품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커피 한 잔과 빵이 놓여 있다. 코르크가 튀어나온 와인병과 과일 바구니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침실의 공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허공에서 내려진 콜(Call) 서비스 손잡이다. 이 침대에서라면 마음 편히 누워 뒹굴뒹굴할 수 있다. 완벽한 휴식을 이루어낼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의 초현실주의 일러스트레이터 야첵 예르카(Jacek Yerk, 1952~)는 폴란드 북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내내 폴란드 침공의 전쟁을 보면서 자라났고, 그의 고향에 있던 고색창연한 낡은 건축물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예르카는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리얼리즘 회화나 추상회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반 아이크, 로베르트 깡팽, 히에로니무스 보슈 등의 중세 및 르네상스 초기 작품과 르네 마그리트 같은 작가의 작품을 연구했고, 그로 인해 초현실적이고 신비롭고 세밀한 그만의 작품 스타일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야첵 예르카의 신비로운 그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간다.

그의 작품은 기이하고 신화적인 작은 짐승들, 세밀한 묘사에서 보쉬의 분위기가, 기이한 건축물과 풍경에서 브뤼겔의 분위기가 난다. 상관없는 사물들을 함께 배치하여 놓은 화면의 구성은 르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사물과 사물을 엉뚱하게 결합하여 낯선 관계에 둠으로써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 그림 ‘달빛 침대’ 역시 그러한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한 그림이다.

그렇게 고대하는 주말에도 푹 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말에도 종종 직장에서의 문자나 고객의 전화가 온다. 그런 일이 없더라도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팍팍하다. 주말이어도 밀린 빨래나 요리, 미리 해 놓아야 할 잡다한 일들로 분주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러한 주말에도 밤이 온다. 그리고 평일의 전쟁 같은 날에도 분명 밤이 온다.

그렇다. "하루를 견디면 선물처럼 밤이 온다." 분명 오늘도 선물 같은 밤이 온다. 그 매일의 약속 때문에 우리는 용기 있게 하루를 맞고 용기 있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런 용기 있는 이에게 꼭 ‘달빛 침대’가 준비되어 있기를. 그에게 주어진 선물이 온전한 휴식이 될 수 있기를. 온전한 회복의 신비가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바라본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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