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07 17:35

옛 왕조 임금 밑의 부하들을 대개는 신(臣), 신료(臣僚), 신하(臣下)라고 적는다. 가장 핵심을 이루는 臣(신)이라는 글자는 원래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설은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잡혀 왔거나, 그 밑에 있어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원래 글자는 머리를 수그린 채 눈을 치켜떠서 위를 바라보는 모습이 특징이다. 따라서 전쟁 등에서 잡혀 온 뒤 잡일을 맡아 행하는 ‘노예’였으리라는 추정이 제법 유력하다. 그로부터 번진 뜻이 누군가의 밑에서 심부름 등을 하는 존재, 즉 ‘부하’의 새김이다.

왕조 시절 임금 밑에서 신하를 하는 사람의 지체야 제법 높았다. 적어도 벼슬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벼슬자리 아니더라도 임금이나 왕족 등의 일상적인 삶을 옆에서 돕는 내신(內臣)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개 ‘임금의 신하’라고 하면 벼슬자리에 당당히 나아간 과거 급제자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의 자질이 서로 다르듯이 신하 그룹 안에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양하게 어울렸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임금이나 왕조의 큰 틀을 위해 직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제가 고상하게 품었던 포부 등을 펼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다. 이들은 대개 충신(忠臣)으로 부른다.

그 반대를 이루는 사람들이 바로 간신(奸臣)이다. 간악(奸惡)하며 간사(奸邪)한 짓을 일삼으면서 임금의 눈과 귀를 가려 제 잇속을 채우는 사람을 일컫는다. 국가와 사회의 운명은 결코 눈에 두지 않는다. 오로지 취하는 것은 임금의 권력에 기대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그런 사악한 성품의 간신 이미지는 대개 비슷하다. 갸름한 얼굴에 희고 창백한 피부, 가느다란 음성 등으로 말이다. 우리 TV나 영화에서 만든 이미지다. 실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육중한 몸매에 그럴 듯한 품행, 뛰어난 글 솜씨 등으로 유명했던 간신들도 많다.

역대 동양의 ‘간신 급’ 인물들을 보면 재능은 나름대로 비범했다. 적어도 임금의 눈에 띌만한 재주 하나 이상은 다 지녔던 모양이다. 말도 그럴 듯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임금도 속이고, 동료인 다른 신하들도 깜빡 속였을 테니 말이다.

제 자리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유지하면서 임금의 귀와 눈을 슬쩍 가려 제 잇속을 가득 채웠으면 나름대로 기능적으로는 뛰어난 인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간신(奸臣)은 겉모습이 간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갸름한 얼굴에 사악한 마음으로 아첨만 일삼는 사람은 영신(佞臣)이라고 별도로 적었다.

임금을 얄팍한 방법으로 속이고 또 속여 혼란의 도가니로 이끄는 사람은 난신(亂臣)이다. 도적질에 다름없는 짓을 했으면 적신(賊臣)이다. 사악한 마음과 행위를 보였으면 사신(邪臣)이라고 했다. 악신(惡臣)은 그와 동렬의 존재다. 비굴한 마음으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유신(諛臣), 임금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면 사신(詐臣), 이런저런 능력마저 없이 자리만 지키고 앉았더라면 용신(庸臣)이다.

이런 해악을 끼치고, 또 쓸 모조차 없는 ‘신하’들의 면모를 우리가 요즘 죄다 보고 있다. 쓸 모만 없었더라면 그나마 화가 덜 날 테다. 제가 보필했던 지도자를 망치고, 국가와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을 불러들였으니 간신을 넘어 난신이요, 적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신하’들만 탓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권력의 정점을 형성했던 대통령의 눈과 귀가 허망할 정도로 이들에게 막혔다는 사실이 진정한 문제의 근원이다. 협량(狹量)이 우선 돋보이고, 사리(事理)를 제대로 따져 물을 식견(識見)과 지식에서도 대통령은 너무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니 중지(衆智)가 모였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라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 소통과 이해, 협력을 통한 중지의 집중, 다시 그를 통한 판단과 실행에 있다면 우리 대통령은 그 어느 하나의 대목에서도 점수를 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기대고 살았던 나무가 쓰러지면 그곳에 더불어 살던 원숭이들은 다 흩어진다고 했다. 樹倒猢猻散(수도호손산)이라는 중국 속담이다. 대통령의 위기에 “독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거나 제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요즘 ‘간신’과 ‘난신’의 면면을 새삼 다시 들여다본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문제의 핵심은 국정 최고 지도자의 몫이다. 그런 사람을 끌어들여 믿고 맡겼다가 나라꼴을 이렇게 형편없이 만들었으니, 그 자체가 모두 지도자의 금도(襟度)와 식견, 지식, 품성의 탓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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