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1.11 10:35

버스를 타고 창 쪽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즐겁다. 버스가 통과하는 동네에 따라 휙휙 변화하는 풍경도 좋다. 그렇게 좋아하는 노선의 버스가 몇 개 있다. 한남동에서 이태원을 지나 효창동으로 건너가는 파란 110A 버스도 그중 하나다. 오늘은 그 버스를 타고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다녀왔다.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버스는 멈추고 문이 열렸다.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발을 디뎠다. 바로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놀라운 노랑의 세상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버스 안 회색 공간에서 낙엽 아래 노랑 공간으로 공간이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회색의 색안경을 벗어버린 것 같았다.

세상이 온통 놀라운 노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랑과 주홍 낙엽이 빽빽이 머리 위를 채우고 있었고, 노랑과 주홍이 하나둘씩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기념관까지 가는 길에 옐로 카펫을 깐 듯했다. 이전까지 알지 못 했던 노랑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노랑 가득한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앙리 르 시다네의 가을을 소개하고 싶다.

Henri Eugene Augustin Le Sidaner <Small House at River in Chartres> 1902

앙리 르 시다네(Henri Le Sidaner, 1862~1939)의 부드럽고 포근한 그림은 가을의 분위기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낙엽을 표현한 시다네의 그림들은 스며드는 듯한 빛의 효과와 한 톤 가라앉은 색채 효과를 잘 드러낸다. 맹렬하기보다 은근한 가을의 빛, 생기 넘치기보다 원숙한 노랑과 갈색빛 단풍은 깊이 있는 공간과 색채를 만들어낸다.

그는 매순간 변화하는 빛의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와 빛의 색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려고 했던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러한 기법들을 매력적으로 자기화했다. 인상주의의 빛이 머금은 듯한 색채와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 가까운 기법으로 그만의 채도와 그만의 붓질을 만들어냈다. 맹렬하기보다 은근한 가을의 빛, 생기 넘치기보다 원숙한 노랑과 갈색빛 단풍은 깊이를 만들어낸다.

다시 그림을 보자. 호숫가에 심어진 나무들이 가을을 맞아 빽빽하게 단풍을 맺고 흐드러진 낙엽을 쏟아내고 있다. 붉은빛의 단풍과 노란 빛의 단풍이 나무 위와 아래를 채우고 있다. 노란 낙엽은 대부분 먼저 떨어진 것 같다. 나뭇가지에 아직 달려 있는 것은 붉은 단풍잎이다. 시나네는 낙엽을 표현하기 위해 짧은 붓질을 사용했다. 붓질을 끊어 작은 색점들을 성실히 쌓아간다. 이러한 색점의 겹침들이 깊이를 만들고 색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며 공간을 풍부하게 한다.

두 명의 사람이 화면의 오른쪽에서 서서히 진입하고 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보면 무척 친밀한 사이인 것 같다. 그들의 다리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왜인지 서서히 걷고 있는 듯한 방향성이 느껴진다. 그들은 가득 쌓인 낙엽 위로 저벅저벅 소리를 내고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푹신한 낙엽층이 신발에 닿아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강과 나무 뒤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이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문과 창문이 여러 개 달려 있는 것을 보니 방이 많은 건물이다. 호수 위로 나무와 집의 그림자가 비쳐 보인다. 수면 위로 떨어진 단풍잎들이 수면과 공기와의 경계선을 확실히 알려 준다. 단풍이 지며 굽어진 이파리들이 그 곡면을 따라 빛을 받고 그늘을 만들어낸다.

시다네가 만들어내는 가을은 용어 그대로 '그림책의 한 장' 같다. 누구나 그 그림의 일부가 되고파 한다. 그 풍경 사이에 들어가면 조용히 가을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을 가운데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2016년 11월, 대한민국에서도 그림 같은 노랑이 피어난다. 이 노랑은 선물처럼 주어진다. 누구든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이 비현실적인 노랑 가운데 뛰어들 수 있다. 며칠 남지 않은 가을을 놓치지 말고 노랑의 일부가 되어보자.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보자. 이미 추위는 본색을 드러냈다. 귀하디 귀한 며칠이다. 이 놀라운 노랑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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