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15 15:39

물러서는 일은 나아가는 행위보다 때로는 매우 많은 노심(勞心)에 초사(焦思)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어렵다. 제가 지닌 상당 부분의 권력과 재물, 기회 등을 저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 때문인지 물러나는 일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용퇴(勇退)’라는 낱말이 만들어졌다.

나름대로 유래가 있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를 꺾는 데 성공한 사람의 하나가 범려(范蠡 BC536~BC448 추정)다. 그가 지닌 역사적 위상은 매우 높다. 중국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지략가(智略家)로 꼽히기 때문이다.

그는 월나라 왕 구천이 이웃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와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패해 지독한 궁지에 몰렸을 때 함께 고생했던 측근 대신이었다. 그러나 굵직한 책략 몇 가지를 만들어 결국 구천을 도와 오나라 부차를 꺾었다. 월나라 부흥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그런 그가 월나라 왕 구천과 함께 오나라를 제압했을 때 보인 행동이 이채롭다. 그는 숨어 지내는 길을 택했다. 오나라를 무찌르는 과정에서 가장 빼어난 공신이었음에도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 서시(西施)와 함께 강호(江湖)로 숨어들어 이름을 바꾼 뒤 상인으로서 거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구천의 사람됨을 믿지 못했다. 함께 어려운 시절을 겪을 수는 있으나 성공을 거둔 뒤에 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달콤한 유혹을 모두 끊고 강호에 몸을 맡긴다. 그런 그의 행동을 두고 중국인들은 거센 물길에서 용감하게 물러난다는 뜻의 ‘급류용퇴(急流勇退 혹은 激流勇退)’라는 표현을 쓴다.

그냥 물러나면 물러나는 것인데, 왜 하필이면 용기라는 의미의 ‘용(勇)’을 붙였을까. 그 용의 본질은 ‘과단(果斷)’에 있다. 이 과단이 무엇인가. 열매를 뜻하는 果(과)와 단호히 끊는다는 뜻의 斷(단)이 붙었다. 앞의 果(과)는 ‘열매’ ‘과실’의 새김에서 발전해 ‘단단하게 맺어진 상태’의 의미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果斷(과단)’은 ‘과감하게 끊어 버리다’의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물러나는 일이 나아감보다 더 어렵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성체인 사람은 그로부터 다시 번지는 수많은 욕망에 눈과 마음이 쉽게 어두워진다. 따라서 그런 욕망을 끊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물러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굳이 ‘勇退(용퇴)’라고 적었을 테다.

나아가고 물러남은 모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때를 맞추지 못하면 실패한다.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이름은 이름대로 무너진다. 이를 중국에서는 ‘身敗名裂(신패명렬)’이라고 적는다. 늑대가 웅크렸던 자리처럼 이름이 볼썽사납게 망가진다는 뜻에서 ‘聲名狼藉(성명낭자)’라고 표현키도 하며, 냄새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고 해서 ‘臭名遠揚(취명원양)’이라고도 적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가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냥 대통령 자리에 남아 있느냐, 아니면 물러서느냐의 문제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대통령은 도덕적인 명분을 잃었다고 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명분을 잃었을 때 매우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대한민국의 행정 체계를 이끌 당위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러나는 일이 다음 수순이라는 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좀체 물러설 기미가 없다.

소위 ‘친박’을 비롯한 대통령 극단 추종세력, 그를 포함한 5% 정도의 지지자를 제외한 많은 이의 여망(輿望)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의혹이 조금이라도 몸체를 드러낼 경우 도덕적 당위를 잃은 대통령 자리를 내놓고 2선으로 물러나 거국(擧國) 중립내각을 구성해 국난(國難)과도 같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보이는 자세는 침묵과 과언(寡言)을 통한 비판의 우회, 자리와 권력에의 탐련(貪戀)에 가깝다. 그 점은 보잘 것 없으며 무모한 용기다. 우리는 그를 소용(小勇) 또는 만용(蠻勇)으로도 부른다.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을 따져 옳고 그름에 입각해 물러서는 용기가 대용(大勇)이다. 그로써 물러서는 일이 용퇴(勇退)다. 박 대통령이 역사의 무게와 함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볼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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