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11.21 10:36

박근혜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에 대한 완벽한 영어 번역이라고 올라온 패러디가 있다.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Creep(역겨워)’이다. “나는 역겹고, 또라인데 여기서 뭔 지랄인가? 여기서 난 왕따다(But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참으로 적절한 가사다.

국제적인 영화배우 송강호는 <변호인>을 찍은 후 3년간 다른 영화에 출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바로 박근혜와 비선실세에게 찍혀서다. 문화부 장관이 제작한 블랙리스트에는 문화예술인이 무려 9473명이나 된다. 문화예술계를 주무른 차은택 본인도 CF감독이면서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다. 참으로 못생겼다.

박근혜가 역겨워 보이지만 부전여전이라 기실 박정희는 더 했다. 그는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문화적이었다. 1950~1960년대는 검열이 적어 우리 영화와 음악계는 전성기였다. 박정희도 이승만의 개방형 문화정책을 좆아 초기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신과 긴급조치를 발의하며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들불처럼 번진 통기타음악이 탄압의 대상이었다. 통기타라는 게 한 달 남짓 배우면 대충 코드잡고 반주가 가능하다. 어디서든 모여서 자신의 느낌을 노래하며 놀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이게 싫었다. 더러운 히피문화의 영향이라며 통기타를 빼앗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 모두 국가안보를 저해하고 불신풍조를 조장하는 행위이자 퇴폐적이고 저속한 노래라 했다.

탄압의 아이콘은 김민기였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자면 가사는 순박하고 노래는 진솔하다. 그냥 청년들의 내면적 고뇌를 담았을 뿐이다. 도무지 탄압당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반항이라 우겼다. 김민기를 필두로 가수들은 고문을 당하고 노래는 금지됐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불신조장, 송창식의 <왜 불러>는 장발단속, 배호의 <0시 이별>은 통행금지 위반, 신중현의 <미인>은 장기집권 풍자라는 이유다. 심지어 <키다리 미스타 김>은 키 작은 각하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금지한다.

박정희가 금지곡 대신 제시한 건 건전가요다. 박정희가 풍금을 연주하며 직접 작곡했다는 <새마을노래>는 일본의 요나누끼 장음계를 바탕으로 한 왜색이다. 일제 때 비슷한 노래가 많았다. 즉 <새마을노래>는 일본 유신(維新)을 베끼듯 일제 때 노래를 짜깁기한 것이란다.

건전가요는 찌질함과 역겨움의 극치였다. 1964년에 국민의 정신을 순화시키고, 안정된 마음을 길러낸다는 빌미로 시작했다. 그런데 그딴 걸 누가 듣겠나? 판을 내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1970년대부터는 강제로 모든 앨범에 넣는다. 극악무도한 짓이다. 탄압하고 고문한 뒤 예술가의 피땀 어린 작품에 더러운 흔적까지 파서 남겼다. 무임승차다. 겁탈의 상흔이다.

건전가요 가운데는 ‘불후의 명작’도 있다. 바로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이다. 각하 찬양 노래를 지으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국토 찬양으로 작곡했다. 만일 그가 강요에 못 이겨 <아름다운 각하>를 만들었으면 어찌 됐을까? 상상만으로 아찔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하지만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건 북한이 아니라 학생과 시민이었다. 유신정권은 북한을 경계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국민을 경계했다. 창조와 창의도 싫어했다. 통기타를 다 뺏고, 대마초를 빌미로 가수들의 공연을 대거 금지시키니 방송은 트로트만 남았다. 왜색 문화로 가득한 곳이 바로 그들이 원하던 세상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펴야 열매가 열린다. 문화예술은 꽃이고 사회적 생산은 열매다. 정치가란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로 인기를 먹고 산다. 그래서 자기도 꽃이며 열매이고 싶어한다. 자기만 꽃이고 자기만 열매이고자 하는 건 역겨운 억지다. 예술계를 탄압한 박근혜와 그 일당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박정희는 이 분야 최강이었다. 그의 치적이라는 경제발전이라는 열매도 실은 건전가요 만들어 겁탈하듯 조작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블랙리스트나 만들며 진정한 창조를 혐오하던 박근혜 정권은 엉뚱하게도 ‘창조’를 노래한다. 그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박정희가 권장했다는 왜색 건전가요에 있다. 그렇다. 박근혜는 유신의 문화정책을 ‘순실’로 채우고 진정한 문화나 창작은 겁탈하고 싶어 한 것이다.

몸에서 우러나는 느낌이 바로 창조다. 그러니 정권이 아무리 막아도 넘쳐나는 창작의 의욕은 절대 꺾을 수 없는 것이다. 막으면 다른 부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바로 촛불 같은 것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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